이지훈의 시네필로
| <워페어> : 현대 전쟁과 인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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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지훈의 시네필로 <워페어> : 현대 전쟁과 인륜 이지훈 필로아트랩 대표 <워페어> (Warfare, 2026)는 이라크 전쟁이 사냥으로 변하고, 반인륜적으로 치닫는 모습을 묘사한다. 알렉스 가랜드 감독이 이라크 전쟁 베테랑인 레이 멘도사와 함께 연출했다. 포인트는 미군 저격수와 알카에다 급조폭발물 IED의 대결이다. 여기서 사냥은 비유가 아니다. 저격수가 하는 일은 사냥이다. ‘스나이퍼’의 어원은 (총으로 쏘아 맞히기 어려운) 도요새 Snip 사냥이다. 또 영화에서 알카에다의 작전도 사냥이었다. 고래 사냥에 가깝다. 예전에 포경선들은 일부러 새끼 고래에게 먼저 작살을 꽂아 도망가지 못하게 만들었다. 어미 고래는 위험을 인지하고도 새끼를 버리지 않고 주변을 맴돈다. 결국 어미와 새끼 모두 사냥당한다. 알카에다의 작전도 비슷하다. 먼저 미군 저격수가 몸을 숨긴 주택 2층에 몰래 다가가 수류탄을 던져 넣는다. 이들의 사살이 주목적이 아니다. 진짜 노림수는 부상자 후송에 있다. 알카에다는 부상병을 호송하는 동료들과 브래들리 장갑차, 전원 몰살을 시도했다. 고래 사냥은 고래의 모성애를 악용했다. 이 작전은 부상자 치료라는 인도적인 행위와 동료애를 악용했다. 전쟁이 사냥으로 변했다, 반인륜적으로 치달았다고 말한 이유다. ⦁미국 자신의 그림자 폭력의 악순환이다. 미군 저격팀과 알카에다 IED는 자기 꼬리를 물고 삼키는 우로보로스 형상을 이룬다. 사실 거시적인 관점에서도 미국은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서 자신의 그림자(※)와 싸운 면이 있다. (※) 칼 구스타프 융이 말하는 그림자. 의식적인 자아가 스스로 인정하고 싶지 않거나 받아들일 수 없어 무의식 속에 억압해 둔 내면의 어두운 면. 융은 자신 안에 어두운 그림자가 있음을 인정하고 자아와 통합할 때 온전한 인간, 성숙한 인격체로 성장할 수 있다고 말했다. 전쟁의 시작은 2001년 9·11 테러였다. 알카에다 조직을 이끌며 9·11 테러를 일으킨 주범인 빈 라덴과 탈레반은 원래 아프가니스탄에서 미국 CIA 지원으로 소련과 싸웠던 게릴라 부대 출신이다. 또 사담 후세인의 이라크는 1979년부터 이란을 견제하려고 미국이 지원하고, 이용한 나라였다. 미국은 자신이 만든 괴물과 싸우고 있다. 미국과 그의 적들은 어두운 생태계를 이룬다. 지젝의 말처럼 이라크 전쟁은 문명 간(間) 충돌이라기보다 문명 내(內) 충돌이다. 무슬림 근본주의자들은 진정한 근본주의자가 아니며, 근대 세계 자본주의가 낳은 부산물이다. 이들은 아랍 세계가 세계 자본주의에 적응하려고 애쓰는 방식을 나타낸다(『실재의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미국은 전쟁 두 달 만에 아프가니스탄 탈레반의 항복을 받아 냈다. 자신감을 얻은 미국은 2003년 3월 이라크를 침공한다. 하지만 자신이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힘을 풀어버린다. 전쟁이 복잡해진다. 3파전이 된다. 후세인을 지지하던 수니파 ( +이라크 알카에다), 후세인의 억압을 받던 시아파, 그리고 미국이 각각 서로와 싸운다. 영화에서 미군과 싸우는 ‘이라크 알카에다’는 후세인 치하에는 없었다. 독재자인 후세인은 자기 권위에 도전할 수 있는 세력을 모두 억압했다. 미국 침공으로 후세인 정권이 무너지고, 수세에 몰린 수니파가 2004년 알카에다와 손잡았다. 그래서 이라크 알카에다는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한 산물이다. 미국은 또 한 번 자신이 낳은, 자신의 그림자를 마주한다. (※) 영화 무대인 안바르 지역 수니파는 끝내 알카에다와 결별하고, 미군과 협력하기로 한다. 이라크 전쟁에서 극적인 전환점이 된다. 2006년 9월 9일이다. 영화 시점은 이날로부터 두 달 뒤다. ⦁불공정한 공격 방식
이처럼 전쟁 주체가 다원화한다. 그런 한편, 전쟁 양상도 변한다. 처음에 미국은 ‘(아군) 사상자 없는 전쟁’을 내걸었다. 럼즈펠드 국방부 장관은 지상군 개입을 대폭 줄이고 원격, 하이테크 전쟁을 내세웠다. 하지만 현실은 게릴라전으로 장기화한다. 그러면서 저격수와 IED 공격이 두드러진다. 두 공격은 모두 역사적으로 부차적이고, 미개하고, 비겁한 공격으로 여겨졌다. 자신은 신체적 상해를 입지 않고 은밀하게 적을 사살한다는 점에서 공정하지 못하다. 전투에 수반되는 명예, 기사도 정신의 이상을 어긴다고 여겨졌다. 두 공격이 주는 심리적인 영향도 비슷하다. ‘지속적인 위협, 높은 치사율, 반격 불가’라는 공통점이 있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오디세이> ( The Odyssey, 2026 )에서 핵심 모티브가 된다. 오디세우스는 사냥감에 활을 쏘기 전에 활시위를 퉁긴다. 에우마이오스 : 왜 항상 활시위를 퉁깁니까? 오디세우스 : 그게 공평하죠 에우마이오스 : 사냥감에 경고하려고요? 오디세우스 : 명예롭게 싸우려고요 (To fight with honour). 명예롭게 싸운다는 것은 뭘까. 공정(fair)하고 정정당당하게 싸우는 거다. 상대가 적일지라도 인격적으로 존중하고, 비겁하게 속이지 않는 것. 과도한 폭력을 자제하고,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선을 넘지 않는 것. 바로 이것이 오디세우스의 전쟁론이었다. 이런 생각에서 오디세우스는 사냥을 (명예로운) 전쟁처럼 만들려 했다. 하지만 트로이전쟁은 어떻게 전개되었나. 평화의 선물을 받아들이는 상대의 선의와 믿음을 악용하지 않았나. 영화에서 오디세우스는 말한다. 트로이전쟁은 인간들 사이에 신성하게 여겨지던 모든 것을 짓밟았다고. 전쟁을 사냥으로 바꿔 놓았다고. 마찬가지로 이라크 전쟁은 사냥이 됐다. ⦁저격전의 양면성 이라크전에서 저격팀은 보조전력이 아닌 핵심 주력 병과가 된다. 무엇보다도 전쟁 양상의 변화 때문이다. 시가전의 증가와 비정규전, 즉 게릴라전과 테러의 증가는 공격 대상을 선별 타격하는 저격수의 역할을 부각했다. 게릴라전은 ‘적군 /시민’의 구별이 어렵다. 무장 저항 조직은 민간인 속에 숨어서 ‘치고 빠지는’ 작전을 썼다. 이들이 미군을 공격한 뒤 무기를 버리면, 민간인과 구별할 수 없었다. 결국 저항 조직의 손에 무기가 쥐어진 순간, 제거하는 게 가장 효과적이다. 민간인 학살 논란도 없다. 저격수 역할이 돋보인 이유다.
그런 가운데 수니파의 자살폭탄 공격이 잦아졌다. 이들은 미군을 비롯해 시아파가 통제하는 이라크 보안군과 시아파 주민도 공격했다. 어린아이와 여자도 자살 공격자로 나섰다. 이로써 저격 대상의 범위가 더 넓어지고, 모호해졌다. 그런 한편, 저격수의 죄책감도 약해졌다. 아이와 여자도 저격했다. 영화 도입부 카메라는 한 여인을 따라간다. 여인은 저격 팀이 점거한 민가 앞을 지나간다. 이 여인도 잠재적인 저격 대상이었다.
저격 대상의 확대는 드론 공격의 개념 변화와 상응한다. 2000년대 후반 드론 공격은 ‘개인 식별 타격’( personality strike )에서 ‘징후 타격’( signature strike: 특징 공격)으로 확장했다. 전자는 표적이 확실한 테러범이라고 입증된 경우의 타격이다. 후자는 한 단계 더 나아가 혐의에 대한 확신이 아닌 ‘특정 행동 패턴’을 근거로 타격한다. 어떤 행동 패턴을 보이면 남녀노소, 사람을 가리지 않고 타격한다는 뜻이다. 2002년 최초의 드론 공격이 실행된 뒤부터 줄곧 정치적으로 의견이 갈리는 이유다. 저격수에 대한 도덕적 평가도 여전히 엇갈린다. 그런데도 저격수는 대중적으로 존경의 대상이 됐다. 그들의 기술과 효율성은 칭송받고 신화화됐다. ‘가장 긴 거리에서 사살한 기록’을 경신했다는 언론 표현처럼, 저격이 스포츠처럼 여겨졌다. 저격수와 대중 양쪽에서 명예와 경쟁의 대상으로 인식된다. 그 대표적인 예는 영화 <아메리칸 스나이퍼>(2014)에서 찾을 수 있다. ⦁저격수의 신화화 이처럼 대중의 평가가 높아진 요인으로는 전쟁의 기계화에 대한 낭만주의적인 반발도 있다. 현대전은 첨단 기술에 의존한다. 다시 말해, 인간 개개인의 역량에 기대지 않는다. 현대전은 탈개인화, 익명화, 기계화했다. 물론 오늘날 저격수 또한 과학기술 발전의 산물이다. 하지만 다른 전투 방식보다 개인기에 훨씬 더 의존한다. 익명적이고 기술 주도적인 현대전에서 저격은 개인 기량이 돋보이는 몇 안 되는 영역 가운데 하나다. 저격수는 숭배의 대상이 된다.
이 서방세계의 패러다임을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의 근본주의자들도 공유한다. 말하자면 무슬림 근본주의자들은 전쟁의 기계화, 혼합화, 익명화 증가로 저격수 역할이 긍정적으로 재평가되는 세계적인 추세를 따른다. 다만 이슬람 상징체계로 살짝 윤색한다.
지젝의 말을 반복해 보자. 이라크 전쟁은 문명 간의 충돌이 아니다. 문명 내의 충돌이다. 무슬림 근본주의자는 진정한 근본주의자가 아니다. 근대 세계 자본주의에 적응하려고 애쓰는 아랍 세계의 방식을 나타낸다. 역사학자 피터 나닝아 Pieter Nanninga는 말했다. 이슬람 저격수는 지하드 ( 헌신적 분투·투쟁 )의 핵심 가치인 인내와 헌신을 구현하는 자로 재정의된다고. 초기 이슬람 역사도 소환된다. 현대 지하디스트 저격수는 서기 625년 우후드 전투에서 예언자 무함마드의 명령에 복종하고 진지를 지킨 궁수들과 동일시된다. 저격수 활동은 영상으로 제작된다. 이 영상은 심리전 매체였다. 자기 세력의 사기를 높이고, 적들의 사기를 떨어뜨리는. ⦁급조폭발물 IED의 실체 2006년 2월, 시아파와 수니파의 종파 내전이 터진다. 그야말로 같은 문명 내의 충돌이다. 시아파는 ‘처형조’를 운영했다. 수니파·알카에다는 자살 공격을 주로 했다. 양쪽이 모두 애용한 것은 급조폭발물 IED이다. 이들은 미군을 공격할 때도 IED를 애용했다. 영화는 알카에다 IED를 조명한다. 미국의 하이테크 원격 무기와 알카에다 로테크 근접 무기가 맞선다. 알카에다 IED의 근본은 ‘도로 매설’이다. 폭약을 도로에 묻어 설치했다. 이것은 미군을 심각하게 위협했다. 미국의 전쟁 방식은 ‘보급망 전쟁’(supply chain warfare)이다. 대규모 트럭과 차량 행렬을 수용하는 큰 도로에 의존한다. 물자와 병력의 흐름이 끊어진다면, 미군은 무너질 것이다. 그래서 도로 이동 호송대는 지속해서 IED 공격을 받았다. 이러한 취약성은 되돌릴 수 없다. 미국이 보급망 전쟁 방식을 바꾸지 않는 한. 미국은 IED 방어에 6년간 232억 6천만 달러를 투입하지만, 미군 부상·사망자 3분의 2가 IED 피해자였다는 통계도 있다. IED와 미국의 방어는 끊임없이 공진화한다. 아니, 악순환에 빠진다. 톰과 제리처럼 쫓고 쫓기는 경쟁 관계 속에서 어느 한쪽도 확실한 승리를 거두지 못한다는 점에서. 이처럼 미국이 어려움을 겪은 데는 철학적인 문제도 있다. IED는 하나의 특정한 실체로 규정할 수 없다. 어떤 사물이든 IED가 될 수 있다. 폭약을 장착하면 차량, 염소, 사람, 마네킹, 벽돌, 보도블록도 IED다. 또 IED는 온갖 전자 폐기물을 활용한다. 휴대전화, 가정용 적외선 센서… 정치학자인 자이러스 그로브 (Jairus Grove)는 말했다. ‘기술적 본질주의’로는 대응할 수 없다고. IED를 하나의 독립적인 실체로 가정하면, 실패한다고. IED에는 ‘사물 /무기’의 경계가 사라진다. IED 폭발 잔해 44%는 주변 환경과 구별할 수 없다고 할 정도다. 그래서 ‘생활세계 / 전장’, ‘시민 / 테러범’ 경계도 흐려진다. 실제 IED는 대부분 민간인이 돈을 받고 설치했다. 민간인들은 그 일을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다. 학생들도 학비를 벌려고 나섰을 정도였다 ( 이근욱, 『이라크전쟁』, 2011 ).
IED 폭발 ⦁IED는 지뢰보다 함정, 덫 IED는 대개 ‘지뢰’의 한 종류로 분류한다. 하지만 적절하지 않다. 일반적으로 지뢰는 방어 무기다. 주로 방어선을 유지하거나, 아군이 후퇴할 때 적군의 추격을 늦추는 무기다. 이에 비해 IED는 공격 무기다. 또 방어선을 유지한다는 정태적 사고를 벗어난다. IED의 표적은 정부 기관, 경찰서, 미군기지를 넘어 민간인 ‘불특정 다수’로 전환되는 양상도 보인다. 지뢰와 IED는 질 들뢰즈가 말하는 ‘정주민 / 유목민’처럼 대조된다. 정주민은 경계 구축에 힘쓴다. 토지 소유가 명확하고, 경계가 중요하다. 유목민은 영토 개념이 다르므로 방어선 개념도 다르다. 유목민의 활동 영역은 너무 커서 도저히 지켜 낼 수 있는 영토가 아니다. 유목민 집단의 테두리는 영토가 아니라 집단 그 자체다. 영토 경계는 중요하지 않다. 이 점에서 IED는 지뢰보다 함정, 덫에 더 가깝다. 수동적으로 방어선을 지키기보다 적극적으로 사냥감의 동선에 맞춰 표적을 노리니까. 전쟁 무기로서 함정의 기본은 ‘날카로운 꼬챙이를 채워 넣은 구덩이’다. 이런 무기가 전투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경우는 거의 없다. 예외적으로 기원전 52년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갈리아 정복’이 있다. 카이사르는 갈리아 연합군이 지키는 알레시아 성을 둘러쌌다. 성 밖의 전장 곳곳에 구덩이를 파서 뾰족한 말뚝을 박고, 흙과 나뭇가지로 덮었다. 그 결과는 대혼란이었다. 카이사르는 갈리아인이 자기 땅에서 편안함을 느끼지 못하는 전장을 만들었다. 여기서는 ‘방어선 / 공격선’이 나뉘지 않는다. 또 성 밖의 영역 전체를 불안전한 공간으로 만들어 상대의 발을 묶었다. 알카에다 IED 전술과 통한다. IED는 분할과 경계 구축을 위해 개발된 현대식 지뢰보다 함정, 덫에 더 가깝다. 바로 이 점에서 IED는 전쟁을 사냥으로 만든다. IED는 ‘트로이의 목마’처럼 우리의 ‘친밀 공간’을 파괴한다. 인간들 사이의 신뢰를 악용해서 신뢰를 무너뜨린다. 함정, 덫이라는 단어가 부정적이고, 불쾌한 느낌을 주는 이유다. IED는 인간성을 피폐하게 만들 수 있다. 신뢰에는 일반적인 신뢰와 개별적인 신뢰가 있다. 일반적인 신뢰는 자신이 살고 있는 사회에 대한 믿음이고, 일상생활에 관한 것이다. 예컨대 우리는 식당에서 식사할 때 독이 들어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런 일은 적어도 우리 사회에선 일어나지 않는다’라는 신뢰가 우리 삶을 지탱한다. 이런 신뢰감이 깨지면 일상생활을 할 수 없다. IED의 공격 대상이 확대되면, 일반적인 신뢰감을 파괴한다. 이때 IED는 인륜의 선을 넘는다. 나이지리아의 연구자 마크 피터 자타우는 정의했다. IED는 일상생활의 심리적 기반을 불안정하게 만들도록 설계된 문화적 반란의 도구라고. 이제 저격수와 IED의 대립을 살펴보자. ⦁장소의 복수 영화 무대는 2006년 11월 19일 한밤. 이곳은 2005년 중반부터 이라크 알카에다가 장악한 수니파 본거지 안바르 지역, 라마디. 너무 위험해서 미군이 3개월 전 완전히 철수했던 곳이다. 미군 재진입은 이번이 처음이다. 영화는 이 야간 장면을 병사들의 시선, 즉 야간 투시경으로 보여준다.
춤 씰 ( Seal ) 저격 팀은 한 민가를 점거해 정찰, 저격 거점으로 삼는다. 영화는 미국 현대전 패러다임을 보여준다. 승리는 오직 적을 시야에서 놓치지 않는 것에 달렸다. 공중 정찰과 지상 정찰의 협업으로 입체적인 시야를 확보한다. 첨단 광학과 전자통신기술은 시각 체험에서 물리적, 시간적 거리를 삭제했다(고 믿었다). 모든 것은 지금과 여기가 된다. 물리적 거리가 소멸하고, 먼 곳이라는 장소성도 소멸한다(고 믿었다). 어떤 면에서 IED는 장소의 복수다. 소멸한 것은 공간이었다. 공간은 장소를 정복하지 못했다. 그 포스트모던 구호는 물질 조건을 초월한다는 근대적 신화였을 뿐이었다. IED는 근접성을 자각하게 하는 동시에 파괴한다. 근접 (친밀) 공간을 더는 믿지 못하게 만든다. ⦁실재의 침입 2층 방에서 저격수 두 사람이 교대로 시가지를 정찰한다. 한순간 먼 곳을 정찰하는 조준 망원경의 시야 외부에서 불쑥 손이 나타난다. 광학기기로 걸러지고 가공된 현실을 뚫고 들어온 그 손은 수류탄을 던져 넣는다. 저격수이자 의무병인 엘리엇 ( 당시 25세 )과 동갑내기 저격수 프랭크가 다친다. 이들을 후송해야 한다.
방금 수류탄이 폭발한 방에 레이 ( =멘도사 감독, 당시 24세 )가 들어간다. 창밖으로 그림자가 휙 지나간다. 알카에다 조직원은 스쳐 지나가는 그림자, 흐릿한 형상으로만 보인다. 꿈 장면 같다. 레이는 스크린과 렌즈의 외부 실재가 현실에 침입한 사건을 충격적이고 외상적으로 경험한다. 그 경험은 가상적인 꿈, 환각처럼 나타난다. 그걸 ‘현실’로 통합할 수 없으니까. 현실이라는 틀에 다 담을 수 없으니까. 악몽 같은 걸로 경험되기 마련이다. 다시 말해보자. 영화는 오프닝 자막으로 밝혔다. 당시 대원들의 기억을 바탕으로 제작되었다고. 영화는 사람들이 외상적 충격을 기억하는 방식을 보여준다. 우리는 외상적 충격에서 벗어나 일상으로 돌아오려고 그 외상적 경험을 ‘환각화’한다. ‘이건 현실이 아닐 거야. 꿈일 거야.’ 진정으로 외상적인 실재는 이렇듯 환각처럼 표현된다. 그리고 대원들을 기다리는 것은 ‘다중연결 IED’였다. 알카에다는 부상자 후송을 유도하고, 브래들리 장갑차와 저격수 팀을 함께 공격한다. IED는 거대한 살상지대를 형성한다. 이 폭발물은 백린을 포함했다. 백린은 피부에 닿으면 촛농처럼 눌어붙어 뼈까지 녹이며, 강한 독성 가스가 발생한다. 저격수 엘리어트와 ‘샘’ ( 당시 28세 )이 중상을 입는다. 지휘관 에릭 ( 당시 27세 )도 가벼운 외상성뇌손상과 호흡 장애를 겪는다, 대원들은 미군 전술의 핵심인 시야를 확보할 수 없다. 영화는 이들의 시야가 뿌연 느낌을 녹색 공기로 표현한다. 토미 ( 당시 22세 )는 단지 청각에만 기대어 사격한다. 토미는 유령 같은 현실을 마주한다. 모니터, 망원경의 이미지들이 자신의 현실에 들어와 기존의 가상적 현실을 무너뜨리고 있다. ⦁끝나지 않는 전쟁 브래들리 장갑차 네 대가 도착한다. 부상자들과 팀원들을 후송한다. 이 과정에서 보여준 씰 팀의 협력과 동료애는 대단했다. 장갑차가 떠나며, 인근 주택 옥상을 모조리 기관포로 사격한다. 알카에다 조직원들을 견제하는 사격이었다. 소란스럽던 거리가 이윽고 조용해진다. 그러자 조직원들은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이집 저집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전쟁에 이골이 난 듯 태연하고 자연스럽다. 영화는 이렇게 끝난다. 하지만 기관포 사격에도 건재한 존재들의 여운이 있다. 리좀이다. 시작점과 끝점을 알 수 없는 존재들의 생명력이다.
존재들의 생명력은 엔딩 크레딧 직전, 미국 씰 팀의 현재 영상에서도 이어진다. 그날 IED 폭발로 왼쪽 다리와 목소리를 잃고, (영화가 묘사한 것과는 달리) 몇 주 동안 혼수 상태에 빠졌던 엘리엇이 영화 촬영 현장에 등장한다. 표정과 몸짓이 유쾌하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 전쟁이 (후유증을 포함해) 완수되지도, 종결되지도 않았다고 하는 인상을 준다. ⦁여단장의 지혜 라마디 상황을 다시 보자. 앞서 2005년 중반부터 알카에다가 이곳을 장악했다고 했다. 그런데 내막은 조금 달랐다. 이곳 수니파 주민들은 알카에다와 갈등을 빚고 있었다. 같은 수니파이지만, 근본주의를 견딜 수 없었던 거다. 사실상 알카에다는 암살과 협박으로 주민들을 지배하고 있었다. 주민들은 자체 수비대를 구성하려 했지만, 시아파 중앙정부의 반대로 실패했다. 시아파는 수니파의 재무장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이에 2006년 6월 미군 여단장 숀 맥파랜드는 수니파 주민들을 보호하기 시작했다. 다른 도시처럼 도시 외곽 전진기지에 병력을 집중하지 않았다. 그 대신 부대를 소규모로 나누어 시가지 전역에 배치했다(영화는 이 배치 방식을 보여 주었다). 이처럼 안전이 어느 정도 보장되자 주민들은 알카에다와 단절하고, 미군과 협력을 선언했다. 이른바 ‘안바르 각성’이다. 그러자 미군은 주민들에게 무기를 공급하고, 여단장 재량 자금으로 재정을 지원했다. 또 주민을 보호했다. 이제 주민들은 자체 ‘경찰군’을 만들 수 있었다. 알카에다의 공격 횟수는 빠르게 줄어들었다. 이때 여단장의 결정은 정부 승인을 받은 게 아니었다. 하지만 현명했다. 얼마 안 있어 이라크 전쟁의 해법으로 인정받았다. 그전까지 시아파 중앙정부는 수니파 주민의 희생(절멸)을 바랐다. 또 미군 지휘부는 수니파 주민을 알카에다와 동일시했다. 그런데도 여단장은 지역 경찰처럼 주민을 보호했다. 또 수니파 경찰군을 창설하고, 이들과 함께 알카에다를 소탕했다. 맥파랜드 여단장의 사고는 유연했다. ‘무슬림은 모두 테러범이다’라는 가상적 언어의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났다. 다시 말해 ‘수니파 =알카에다 =테러 조직’이라는 고정 관념에서 벗어났다. 그래서 ‘시아파 =아군 / 수니파 =적군’이라는 경직된 생각을 버릴 수 있었다. 여단장은 ‘아군 / 적군’의 이분법을 옹호하면서도 거리를 두었고, 거리를 두면서도 옹호했다. ⦁‘루저 서포트’ ( Loser Support ) 지구상에서 인간만이 ‘대량 살육 전쟁’을 벌인다. 영장류의 싸움은 반드시 화해가 뒤따르고, 충돌을 피하려는 의사소통도 한다. 고릴라의 싸움에는 승패가 없다. 반드시 중재자가 나타나 승패가 나지 않게 한다. 한쪽이 질 것 같으면, 중재자가 약한 쪽을 응원해 승패가 나지 않게 한다. 승자를 만들지 않고, 대등하게 ‘체면’을 유지하는 게 평화 공존의 길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루저 서포트’라고 부른다. 맥파랜드 여단장이 수니파를 지원해 평화를 가져온 것도 ‘루저 서포트’다. 현존하는 ‘원시 부족’에도 부족 간 분쟁은 있지만, 제노사이드(전면 살육)는 없다. 기본적으로 체면 (명예) 싸움이어서 서로의 체면이 서도록 분쟁을 수렴시키는 지혜가 축적되어 있다. 우리는 언제부터 이 지혜를 상실한 걸까. 2004년 이라크조사단은 밝혔다. 사담 후세인은 핵무기와 생화학무기 개발을 1990년대 초에 이미 포기했다고. 그런데도 유엔사찰단을 거부한 건 자신의 대외적 입지가 약해질 걸 두려워했기 때문이라고. 다시 말해, 사찰을 수용하면 체면이 깎이니까 거부했다는 말이다. 당시 미국은 이라크 체면을 세워주며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을까. ⦁전쟁과 언어 어쩌면 미국도, 이라크도 자신의 언어가 스스로 족쇄가 되어 서로 물러설 수 없었던 게 아닐까. 대규모 전쟁은 영토, 이권을 둘러싼 정치·경제적 의도로 일어난다. 하지만 위정자들은 그 의도를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위정자들은 공동체를 사랑하는 인간 본성을 이용하고, 조작해 전쟁으로 이끈다. 그러려면 가상적 개념(국가, 민족)과 여기에 대립하는 적이 필요하다. 언어 없이는 그런 개념을 공유할 수 없다. 인류학자 ‘야마기와 주이치’의 말처럼 전쟁은 언어의 출현과 깊은 관계가 있다. 언어는 ‘가상적인 것’을 체험, 전달, 공유하게 할 수 있다. 언어는 가상의 공동체도 만들어 낸다. 언어가 만든 국가나 민족 같은 가상적 개념이 전쟁으로 이어진다. 언어를 사용하게 되면서 ‘나쁜 것’을 모두 적(다른 국가, 다른 민족) 탓으로 돌릴 수 있게 되었으니까. 언어 (조작) 없이는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 가상의 집단을 지키려는 자기희생도 생기지 않는다. 실제 전장에서 병사들은 자신이 얼굴을 아는, 사랑하는 이들을 지키려고 싸울 뿐이니까. 『휴먼카인드』의 저자인 뤼트허르 브레흐만은 이렇게 결론 내린다. 인간은 적을 미워해서 전쟁하는 게 아니라, 동료를 위해 싸운다고. 즉, 인간은 본성적으로 전쟁을 좋아하는 게 아니라, 동료를 보호하고 신뢰를 저버리지 않으려고 전쟁터에 나간다는 말이다. 영화 도입부, 한 병사는 말한다. “우리가 누굴 위해 싸우는지 잊지 말라고.” 전쟁 기획자들은 이 구체적이고 근접적인 동기, ‘언어 이전’의 에너지를 가상(추상)적인 국가, 이념으로 연결하려고 기를 쓴다. 또 일단 연결되고 나면 언어 이전의 에너지가 가상적 언어 쪽으로 폭주한다. 그러면 전쟁을 막기도, 중단하기도 어려워진다. 위정자들의 언어가 스스로 족쇄가 되는 거다.
⦁언어 이전의 에너지 영화는 ‘언어 이전의 것’으로 충만하다. 그것은 ‘신체의 동조’로 표현된다. 신체 동조는 누군가와 함께 ‘같은 것’을 보고, 듣고, 먹고, 같이 일하는 데서 발생한다. 오감을 사용한 신체적인 공감이나, ‘같은 경험’의 공유다. 영화는 동료들의 신체 동조를 묘사한다. 같은 음악을 듣고, 춤추고, 같은 물병으로 물을 마시고…
신체 동조는 신뢰감을 만든다. 이것은 당연히 시간이 걸린다. 대신, 언어의 교환만으로는 얻을 수 없는 신뢰를 쌓을 수 있다. 진정한 화해도, 신뢰감도 신체 동조를 바탕으로 한다. 그래서 ‘공동체를 위하는 인간의 사회적 본성’과 연결된다.
반복한다. 위정자들은 이 ‘언어 이전’의 에너지를 가상(추상)적인 국가, 이념으로 연결하려고 애쓴다. 또 일단 연결되고 나면 언어 이전의 에너지가 가상 언어 쪽으로 폭주한다. 그 결과는 상대(적)에 대한 공감 가능성이 결여된 행위로 나타날 수 있다. 원격 공격과 IED는 모두 공격 대상에 대한 공감 가능성을 박탈하는 전쟁 기술이다. 이 기술은 또한 적에 대한 공감 능력을 박탈하는 언어, 이분법적 언어, 위정자의 언어에 상응한다. ‘무슬림은 테러범이다.’, ‘서방세계는 악마다.’ 맥파랜드 여단장의 지혜가 소중하다. 그는 가상적 언어에 휘둘리지 않았다. 사실 ‘높은 곳’에서 명령을 내리는 지도자들은 피해를 보지 않는다. 문제는 그 언어에 휘둘려 희생되는 사람들이다. 엔딩 크레딧 앞 영상은 언어와 ‘언어 이전의 것’ 사이에 있는 긴장을 드러낸다. 이때 음악은 <Dancing and Blood>. 노래 가사는 ‘실망감, 탈진, 환멸감’으로 가득하다. 감독의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해석해 본다. 전쟁은 가짜였지만, 흘린 피는 진짜였고, 전우애는 진짜였다고. 당시 전쟁을 부추기던 위정자들의 언어는 가짜였지만, 동료들과 함께 한 춤, 신체 동조는 진짜였다고. 이 관점에서 엘리엇이 중지를 세우는 손짓을 이해한다. 또 배우들의 신체 동조도 이해한다. 이 손짓은 언어 이전의 에너지가 위정자들의 언어에 보내는 ‘언어 이전의 메시지’가 아닐까. 멘도자 감독은 말한다. 국회의원들이 이 영화를 보고, 군인들을 전쟁터로 보내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기를 바란다고. 만약 전쟁을 벌이기로 한다면, 우리는 전쟁에서 돌아온 우리 군인들을 돌봐야 한다고.
또 초인적인 의지로 재활에 성공한 ‘샘’( 실명은 Joe Hildebrand )은 말한다. “전사로서 우리는 전쟁을 받아들인다.… 하지만 진정한 리더십이란 불필요한 갈등을 피하려고 애쓰는 것이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