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로운 시선
<되살아나는 목소리> : 어머니의 노래는 끝나지 않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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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살아나는 목소리> : 어머니의 노래는 끝나지 않는다 김현진 (부산국제영화제 시민평론단) 이 거대한 영화 앞에서, 어떤 식으로 글을 써나가야 할지 한참을 망연자실하다가 겨우 생각을 적어본다. 재일 조선인 2세와 3세인 박수남, 박마의, 이 두 모녀의 다큐멘터리 영화 <되살아나는 목소리>의 상영시간은 148분이다. 단언컨대 이 영화는 단일한 한 편의 영화가 아니다. 이 영화는 두 편의 영화가 합쳐져 있다. 일제 강점기 시대의 피해자들, 위안부, 강제노역, 원폭 피해자들, 학살의 생존자들의 증언을 자신의 인생의 절반을 바쳐 기록영화로 만들어온 다큐멘터리 감독 박수남의 미공개 필름들, 편의상 이를 영화 <박수남>이라고 한다면, 또 한 편의 영화는 이 필름들을 디지털로 복원하면서, 그 필름들을 촬영했을 당시의 박수남의 기억과 회고를 영화로 찍어가면서, 이런 어머니를 둔 딸로서 어머니의 삶과 자신의 삶을 바라보는 딸의 영화 <박마의>가 있다. <박수남>이 필름으로 된 한 편의 영화라면, <박마의>는 <박수남>에 대한 메이킹 필름, 그 영화를 만든 과정에 대한 뒷이야기들을 기록한 것이다. 기록들과, 그 기록들에 대한 과정을 담은 또 하나의 기록이 합쳐진 영화. 이 두 영화적 요소들은 두 모녀 사이처럼 불가분의 관계이며 마치 화음처럼 한 영화 속에 녹아있다. 제목이 <되살아나는 목소리>인 것은 이런 이유도 있을 것이다. 먼저 ‘목소리’들이 있었고, 그 목소리들이 되살아나는 과정. 앞서 거대한 영화라고 말한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이를 잇는 공통분모는 단연 이 영화의 주인공인 박수남 감독이다. 그녀가 영화 내내 보여주는 에너지는 그저 놀랍다. 그녀는 박마의 감독의 어머니이기도 하지만, 비유적인 의미로 그녀가 촬영한 수많은 억울한 사람들의 목격자이자 보호자, 어머니이기도 하다. 그들은 일본 정부와 한국 정부의 무관심과 냉대 속에서 목소리를 내어도 외면당했으나, 박수남 감독만은 그들의 목소리를 듣고 그들을 위로하며 같이 싸우겠다는 다짐을 한다. 그들은 박수남 감독 앞에서 마음 편히 운다. 설움이 북받쳐서. 그리고 나의 목소리를 들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게 고마워서. 이 거대한 어머니의 결기와 끈기가 이 영화의 핵이다. 필름 속 박수남 감독은 잘 듣는 사람이면서 또한 잘 말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영화는 나이 구순에 다다른 고령의 박수남 감독의 모습도 같이 담는다. 강연과 그 당시 필름 촬영에 대한 뒷이야기, 자신의 인생에 대한 회고의 목소리들. 다리가 불편해 휠체어가 필요하고 시력을 점점 잃어가는 난치병을 앓고 있지만, 박수남 감독의 정신만은 늙지 않는다. 필름과 녹음된 테이프들의 음성만 들어도 그것이 언제 누구를 무엇을 기록한 것인지 전부 생생히 기억해내는 비상한 기억력도 그러하고, 영화를 통해 일제의 만행을 지우려는 일본 정부에 대항해 끝까지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기억해 그들의 책임을 물어야 함을 강변하는 점도 그렇다. 박마의 감독은 그런 어머니를 주로 카메라 앞에 세우고 자신은 대부분 카메라 뒤에 물러나서 차분하게 나레이션으로 해설의 역할을 맡는다. 박수남 감독의 장면이 1인칭 주인공 시점의 영화라면, 박마의 감독은 주로 1인칭 관찰자의 역할을 맡는 것이다. 좀처럼 자신을 잘 드러내지 않는 그녀가 자신의 어릴 적 이야기를 하는 부분이 인상적이다. 조선인이기 때문에, 박마의라는 한국 이름 때문에 일본 아이들에게 놀림 받는 게 싫어서 일본식 이름으로 자신의 본명을 감추고 살다가 열 살 무렵 자신의 본명을 숨기지 않고 살아가게 된, ‘본명선언’ 사건. 영화는 처음 박마의 감독의 이름을 마의태자에게서 따온 이야기를 하는 박수남 감독의 목소리로 시작한다. 신라가 고려가 되자 산 속으로 들어가 끝끝내 고려 백성이 되길 거부한 왕자. 어머니는 그렇게 딸에게 저항정신 가득한 이름을 지어줬고, 어머니의 목소리는 딸에 의해서 영화로 되살아난다. <되살아나는 목소리>는 재일 조선인 박수남 감독의 삶을 돌아보면서 그런 어머니의 인생을 긍정하고 자신의 인생 또한 긍정하는 딸의 영화로 볼 수도 있다. 박수남 감독은 말솜씨만큼이나 노래도 곧잘 하는데, 영화는 그녀가 직접 부르는 ‘마의태자’ 노래로 시작해서 ‘울밑에 선 봉선화’ 노래로 끝이 난다. 이후 이 모녀 감독의 차기작은 태평양 전쟁 때 오키나와 섬에서 벌어진 집단자살 사건을 다룬 것으로 생존자 증언을 기록한 필름을 복원한 것을 바탕으로 만들어진다고 한다. 이 거대한 어머니의 계획에 은퇴는 없다. 어머니의 노래는 끝나지 않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