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지애 (2024 영화의전당 영화평론대상 수상자)
| <파과> : 사랑, 쓸모, 늙어감에 관하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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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과> : 사랑, 쓸모, 늙어감에 관하여 장지애 2024 영화의전당 영화평론대상 수상자 민규동 감독의 영화 <파과>는 익숙한 한국 영화의 문법에서 한 걸음 비켜 서 있다. 그것은 영화가 ‘노년 여성(조각)’에 주목한다는 사실 때문만은 아니다. 영화의 변곡점은 늙어감을 소멸이 과정이 아닌 세상을 다르게 감지하고 해석할 수 있는 또 다른 층위로, 사랑을 이 시점의 관계가 아닌 내면에 새겨진 기억의 반성으로, 쓸모를 사회적 기능이 아닌 자기 존엄의 언어로 재정립하고 있다는 데 있다.
주인공 조각은 과거 ‘손톱’이라 불렸다. 자신을 킬러로 키운 류가 붙여준 이름, 다시 말해 그녀의 삶과 존재를 압축한 코드였다. 손톱은 손의 말단에 붙어 있으나, 그것이 손의 일부인지 아니면 부속된 방편인지 모호한 기관이다. 보호하고, 찌르고, 지워지며, 자라나는 것. 조각은 그 손톱처럼 류의 곁에 붙어 있으면서, 그를 위해 기능했고 그의 세계 안에서 쓸모를 증명했다. 손끝에서 타인을 향해 작동하던 킬러로서의 감각—예민하고 정확한 기능성의 결정체—그것이 곧 ‘손톱’이었다. 하지만 류와의 결별 이후, 손톱은 자신을 ‘조각’이라 부른다. 누군가에게 부여받은 이름이 아닌, 스스로 선택한 이름. 조각은 더 이상 주어진 자를 보호하거나 그 자를 위해 공격하지 않는다. 그녀는 기능의 전체로부터 떨어져 나왔으며, 의미의 체계에서 밀려난 파편이다. 동시에, 그 파편성을 수용함으로써 자율적 실존으로 이행한 존재다. ‘잔존’이라 하기엔 너무 능동적이고, ‘남겨짐’이라 하기엔 너무 의식적이다. 오히려 조각은 남은 것이 아니라, 떨어져 나온 것을 받아들인 자다. 조각이라 명명되는 그 순간, 그녀는 더 이상 기능의 세계에 속하지 않는다. 기능이나 효율이 아닌 존재의 경계, 이름 붙일 수 없는 자리에 존재하는 감각으로 이행한다. 이름을 스스로 선택하는 ‘조각’의 행위는 결국 규정된 서사로부터의 이탈이자 존엄을 되찾는 은밀한 정치학이다. 그리고 그 전환은 ‘손’에서 일어난다. 킬러로서의 약점—손에 생긴 이상—은 단순히 육체적 기능의 퇴행이 아니다. 그것은 손이 더 이상 누군가를 조작하거나 제거하는 도구가 아니게 되었음을. 말하자면 손이 손이기를 멈춘 순간, 조각이라는 존재의 발생을 예고한다. 손이 닿지 못하는 곳을 감지하고, 손이 쥐지 못하는 감정을 느끼게 될 때, 몸은 도구에서 감각으로 전환된다. <파과>는 그 전환의 순간들을 보여준다. 손톱이 벗겨지는 장면, 손의 떨림, 잡으려다 놓치는 제스처와 같은. 그것은 단순한 노화의 징후가 아니라, 관계에서 밀려난 인간이 감각을 되찾는 방식이다. 사회적 기능이 제거되며 조각은 처음으로 자신의 고통을 자기 언어로 감각할 수 있게 된다.
반면, 늙어가는 조각의 반대편에 선 인물. 미스터리한 킬러 ‘투우’는 과거를 내면화한 채 미래를 수렴하려는 자다. 그는 여전히 기능의 언어로 세계를 이해하고, 역할이라는 명목 아래 자신의 현재를 정당화하며, 시간을 직선적으로 순환시키는 과거 중심의 윤리 속에 머무른다. 말하자면 그는, 자신이 살아남은 이유를 과거에 두고, 그 과거를 반복하는 방식으로만 미래를 상상할 수 있는 존재다. 이러한 투우는 끊임없이 과거를 회고하는 조각과 대립되는 듯 보인다. 그러나 조각의 회고는 단순한 감상이나 회귀가 아니다. 그녀에게 회고란 기억을 해체하고, 그 해체된 기억으로 현재를 감각하는 사유의 방식이다. 조각은 과거를 반복하지 않고, 과거로부터 멀어지면서 오히려 더 명확한 자기 판단의 감각을 획득한다. 이처럼 두 인물의 만남은 단순한 재회가 아니라, 존재론적 방향성의 교차. 즉, ‘시간을 되풀이하는 자’와 ‘시간을 다시 쓰려는 자’가 마주하는 지점이다. 그들은 겉으로는 동일한 시간의 감각—과거라는 공통된 층위—를 공유하지만, 그 시간과 맺는 방식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하나는 익숙한 규율에 자신을 봉합하고, 다른 하나는 그 틈에서 벗어나 자기-기입적 존재로 이행하려 한다. 이 모든 과정을 관통하는 상징이 바로 ‘파과’다. 열매가 나무에서 떨어져 갈라지는 순간처럼, 과거의 기억과 기능, 역할과 이름이 갈라지고, 그 틈으로 새로운 감각과 존재의 결이 스며든다. 파과는 단절이면서도 동시에 이행이며, 기억이 무너지는 동시에, 다른 삶의 가능성이 드러나는 존재의 균열이자 기회다.
조각은 점점 더 타인의 호출, 사회의 언어, 과거의 관계로부터 거리를 둔 채, 자신의 호흡으로 시간을 감각한다. 그러나 그녀의 침묵은 단절이 아니라, 자기화된 내면의 밀도로 작동한다. 영화는 이 과정을 극적인 반전이나 감정의 격렬함으로 제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정적 속의 지속, 몸의 사소한 진동, 눈동자의 미세한 방향 전환 같은, 말보다 미세하고 감정보다 근원적인 사유의 단서들을 얼굴과 신체의 클로즈업을 통해 포착한다. 그리고 그 속에서 조각은 점차 과거의 훈련된 몸이 아니라, 지금-여기의 감각에 따라 반응하는 주체로 이행한다. 이전의 조각이 사회적 기능과 역할에 의해 존재했다면, 이제 그녀는 그 기능을 상실한 이후에야 비로소 감각의 윤리를 획득한다. 이 윤리는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다는 종류의 도덕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자기 감정의 움직임을 스스로 감지하고, 타자의 시선 없이도 자신의 존엄을 판단할 수 있는, 존재에 대한 더 느리고 깊은 책임의 언어에 가깝다. 그리고 <파과>는 거대한 질문들을 조용히, 그러나 지속적으로 던진다. “무엇이 인간을 인간으로 유지하게 하는가?”, “쓸모를 다한 존재는 여전히 스스로를 지탱할 수 있는가?”, “기능이 멈춘 몸은 관계의 서사에서 어떻게 살아남는가?” 그리고 “우리는 더 이상 이름 붙일 수 없는 존재를 어떻게 바라보고, 또 어떻게 존중할 수 있는가?” 이 영화에서 노년은 단순한 시간의 말단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말해지지 않았던 생의 감각들이 표면으로 떠오르는 시기이며, 삶이 사회적 언어의 프레임을 벗고 비로소 자기 목소리로 서술되기 시작하는 국면이다. 늙는다는 것은 기억을 소거하는 일이 아니라, 기억의 결들을 자신의 언어로 다시 읽고, 다시 배열할 수 있게 되는 일이다. 조각은 과거에 사로잡힌 존재가 아니라, 과거를 재구성함으로써 현재를 다시 구성할 수 있는 가능성으로 서 있다. 파과란 바로 그 가능성의 문턱이다. 그 균열은 불안정하고 때로는 고통스럽지만, 거기서 비로소 타인이 아닌 자신에게 충실한 존재가 발생한다. 조각은 쓸모를 잃고도 살아 있으며, 기능이 멈춘 손으로도 세계를 감각할 뿐 아니라, 과거에서 벗어난 이름으로도 끝내 자신을 말한다. 그리고 그 말은 이전보다 더 정확하고, 더 절실하며, 더 조용한 힘을 갖는다. 지금 여기서 더 이상 도구가 아닌, 더 이상 수단이 아닌, 끝내 남겨진 것이 아닌, 오롯한 감각과 자신 스스로의 언어로 지금 여기에 있는 한 사람의 얼굴을 응시할 필요가 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