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지애 (2024 영화의전당 영화평론대상 수상자)
| <한란> : 한겨울의 기억, 그 틈에서 피어난 '한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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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란> : 한겨울의 기억, 그 틈에서 피어난 '한란’ 장지애 2024 영화의전당 영화평론대상 수상자 종종 가장 가까이에 있는 기억은, 말해지지 못한 채 머문다. 알면서도 외면했고, 말할 수 있었지만 침묵했다. 그것은 단순한 망각이 아니라, 어쩌면 의도적인 숨김이었다. 너무 가깝고 선명해서 그 기억을 꺼내는 일 자체가 두려움이었다. 그러나 두려움은 곧 책임의 그림자였고 우리는 그 책임 앞에서 오랫동안 말없이 고개를 숙여왔다. 하명미 감독의 <한란>은 1948년 제주 4·3 사건을 배경으로 한 영화다. 그 말만으로도 이미 많은 함의가 담긴다. 한국 현대사에서 4·3은 복잡한 층위를 가진 이름이다. 오랜 시간 국가 폭력에 의해 왜곡되고 침묵 속에 묻혀 있다가 최근에서야 비로소 조심스레 말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말은 아직 충분히 다듬어지지 않았을 뿐 아니라 여전히 완성되지 않은 상태로 흔들리고 있다. <한란>은 그 언어를 자신의 방식으로 직조한다. 영화는 객관적인 역사 지식이나 서사의 감동이라는 말로는 다 설명할 수 없는 감각, 불쑥 들이닥치는 기억의 조각처럼 뼈에 박히는 어떤 ‘온도’에 가까운 것으로 기록한다. 진실은 아직도 하나의 서사로 온전히 복원되지 못했다. 4·3의 기억은 여전히 각각의 생존자와 후손들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살아내는 파편들로 남아 있다. <한란>은 그 파편들을 연결해 사건을 재현하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역사’라는 개념의 중심에서 비켜나 어떤 사적이고 체감적인 추위 속으로 관객을 데려간다. 한랭한 기후 속을 묵묵히 걷는 모녀의 여정을 따라가다 보면, 그들이 마주한 고통을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지만, 그것이 전적으로 ‘타인의 것’이라고도 단언할 수 없다. 그 감정은 어딘가 낯설고 멀게 느껴지면서도 이상하리만치 익숙한 결을 품고 있다. <한란>은 복원되지 않은 풍경, 기억의 조각들을 따라간다. 고증이나 재현이 아니라, 감각의 복원을 택한 연출이다. 영화 속에서 바람은 세차고, 땅은 얼어 있고, 대사는 적다. 이 정서적 절제는 마치 4·3을 다루는 데 있어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감정의 양을 조절하려는 배려처럼 느껴진다. 영화는 관객과 정서적 동행을 시도하는데, <한란>의 그 동행은 무척 조심스럽고 느리다.
그것은 영화가 흔한 영웅 서사나 가해자와 피해자의 선명한 이분법을 피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한란>은 그 이분법이 해체된 자리에, 한 인간이 살아남기 위해 버텨야 했던 시간들과 선택들에 집중한다. 이 영화는 모녀의 이야기다. 어머니 아진(김향기)과 딸 해생(김민채)은 국가에 의해 ‘토벌’이라는 이름으로 벌어진 대량 학살의 와중에 서로를 잃고 또 찾는다. 이들은 투사도 영웅도 아니다. 그저 살아남기 위해 헤메는 자들이다. 이 단순한 줄거리 안에서 영화는 어떤 커다란 정서적 파동을 일으킨다. 그것은 다름 아닌, 이 인물들이 ‘살아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역사적 인물이나 기념비적 인물이 아니라 어딘가에서 살아남으려 했던 사람들. 그들의 이름은 지금은 기억되지 않지만 분명 존재했던 얼굴들이다. 특히 흥미로운 지점은 이 ‘존재했던 얼굴’이라는 표현이 영화 속에서 이중으로 구현된다는 것이다. 바로 김향기 배우의 캐스팅이다. 여전히 아이의 얼굴을 간직한 배우가 어머니 역할을 맡았다는 사실은 단순한 파격이 아니라, 영화의 윤리와 깊이 연결된 전략적 선택처럼 느껴진다. 김향기의 얼굴은 관객의 기억 속에서 오랫동안 소녀의 이미지로 자리해 왔다. 그러한 배우의 페르소나가 <한란> 안에서 돌연 ‘어머니’가 될 때, 관객은 익숙한 이미지와 극 중 인물 사이의 긴장 속에서 정서적 불안을 감지하게 된다. 그것은 단순히 어색함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 부조화를 통해 영화는 모성과 생존, 피해자성과 보호자성의 경계가 어떻게 파괴되고 전도되는지를 시각적으로 드러낸다.
아진이라는 인물은 어머니인 동시에 상처 입은 딸의 몸이기도 하다. 김향기의 ‘아직 다 자라지 않은 얼굴’은 바로 그 이중성을, 혹은 ‘피해자의 어머니’라는 납작한 기표를 벗어나려는 복합적 존재감을 고스란히 반영한다. 즉, <한란>은 김향기라는 배우의 시간성과 이미지가 갖는 상징성을 활용해 ‘피해는 어떤 얼굴로 표상되는가’라는 질문을 시각적이고 감각적인 방식으로 풀어낸다. 이로써 영화는 한 인물의 고통을 단지 서사로만 남기지 않고, 관객의 감각과 기억 속에 각인된 상(像)으로 전이시킨다. 바로 이 지점에서,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한란(寒蘭)’이라는 상징이 다시 떠오른다. 김향기의 얼굴이 담아낸 생존의 복합성은 한겨울에도 피어나는 난초의 이미지와 맞닿는다. 사라지는 것들 속에서도 피어나는 생명의 이미지를 머금은 한란은 영화 속 모녀의 서사와 겹치며, 더 나아가서는 이 역사의 ‘잔존자’들, 다시 말해 여전히 살아가는 자들의 얼굴과 겹친다. 이 영화는 그들을 어떤 상징이나 도식 안에 가두지 않고 끝까지 ‘삶’의 상태로 남긴다. <한란>은 죽음이 아니라 생존을, 결말이 아니라 지속을 말하는 영화인 셈이다.
<한란>은 감정을 소모하거나 이용하지 않는다. 오히려 감정은 절제된 장면과 미묘한 시간의 흐름 안에서 서서히 응축된다. 이 영화가 주는 울림은 그래서 결코 폭발적이지 않지만 오래 지속된다. 영화가 끝난 뒤에도 나는 한랭한 바람 속에서 헤매던 아진의 체온을 잊을 수 없었다. 우리는 흔히 ‘기억하자’고 말한다. 그러나 그 말은 때로 너무 가볍게 느껴진다. 기억은 단순히 아는 것이 아니라, 느끼는 것, 그리고 살아가는 방식에 스며드는 어떤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 <한란>은 ‘기억하자’고 외치지 않는다. 대신 묻는다. 너는, 지금 이 기억 앞에서 어떤 자세로 서 있을 수 있느냐고. 결국 영화는 진실을 규명하려는 영화라기보다, 진실 앞에서의 ‘몸의 자세’를 묻는 영화다. 침묵과 단절, 증언과 망각 사이에서 우리가 취할 수 있는 가장 윤리적인 태도는 무엇인가. 그것은 어쩌면 ‘함께 느끼는 일’에서 시작되는지도 모른다. <한란>은 관객을 강제하지 않는다. 다만 그 추위 속에, 조용히 곁에 서 있다. 그리고 말한다. “나 여기 있어. 네가 외면하지 않는다면, 이 기억은 여전히 살아 있어.”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