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윤 평론가
| <휴민트> - 류승완의 ‘짜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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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휴민트> - 류승완의 ‘짜세’ 이동윤 (부산영화평론가협회) *영화 속 스포일러가 다수 포함되어 있습니다 모든 사건이 끝나고, 국정원 요원인 조 과장(조인성)은 다시금 음습한 모텔 침대에 앉아 있다. 어둠이 방 안을 감싸고 창문 밖 외부에는 알 수 없는 소음이 웅웅거린다. 영화 <휴민트>의 마지막 장면이다. 이 장면은 오프닝 장면의 숏과 구도와 행위가 일치한다는 점에서 수미상관을 이룬다. 그렇다면 한 가지 질문, 이 수미상관은 무엇을 위한 것일까. 아마도 한 남자의 행선에 대한 예고일 수도, 혹은 어떤 결심을 한 자에 대한 다짐일 수도 있다. 또는 직업 영화로서의 무난한 종착역일 수도 있겠다. 다만 경로가 어디로 향하든 하나는 확실한 것 같다. <휴민트>는 류승완의 근작 중 오랜만에 '짜세'가 나오는 영화다. <휴민트>에서 기어이 짜세가 배어 나오는 이유는, 역설적이게도 이 영화가 품고 있는 맹렬한 불균질함 덕분이다. 첩보라는 장르가 본디 망원경과 도청기를 통해 상대를 투시하는 차가운 거리두기의 기술이라면, 멜로드라마는 땀방울과 체온을 섞고야 마는 뜨거운 밀착의 육체성이다. 아마 이 영화가 지닌 클리셰라면, 그것은 멜로드라마에서 기인할 것이다. 어쩔 땐 실소가 나올 정도로 그 설정과 액션-리액션이 투박해 보이는데, 나는 이런 지적을 인지하고도 의도적으로 류승완이 배치한 장치라고 예상해본다. 이를테면 내게 <휴민트>는 장 피에르 멜빌로 출발해, 두기봉과 오우삼을 거쳐, 세기말 조성모의 뮤직비디오 감성을 얹어 왕가위로 끝을 맺고자 하는 영화처럼 느껴진다.
아마도 류승완은 섞일 수 없는 양극단의 온도를 하나의 스크린 위에 쏟아붓고 날것 그대로 충돌시키는, 그 과정 자체에 매력을 느낀 것처럼 보인다. 인물들이 코트 깃을 세우고 침묵할 때는 장 피에르 멜빌의 암흑가에서 걸어 나온 듯 건조하지만, 마약과 인신매매라는 비루한 진흙탕 속에서 방아쇠를 당기는 순간 영화는 두기봉과 오우삼의 낭만적인 혈투로 돌변한다. 북한 총영사 황치성(박해준)이 요원의 옛 연인인 채선화(신세경)를 러시아 마피아의 먹잇감으로 던져놓을 때, 요원들의 머릿속을 짓누르던 이데올로기는 증발한다. 인간의 몸뚱이가 방탄유리 안에 전시되는 참혹한 착취의 풍경 앞에서, 영화는 세기말 한국 멜로 특유의 구원자 서사에 대한 정념을 지니기까지 한다. 냉골 같은 첩보의 이성과 끓어오르는 멜로의 본능. 이 익숙한 클리셰의 파편들이 매끄럽게 봉합되는 대신 서로의 살갗을 긁어대며 파열음을 낼 때, 되려 영화는 이상한 생명력을 발휘한다. 예컨대 인상적인 장면은 채선화가 취조를 받는 대목이다. 영화는 채선화가 취조실의 압박을 견뎌내는 지난한 시간을 일반적인 컷 분할로 넘겨짚지 않는다. 대신 약 1분이 넘는 긴 시간 동안, 화면과 화면을 서서히 겹쳐내는 디졸브를 사용한다. 첩보 장르에서 이토록 긴 '데드타임(Dead Time, 서사적 진전이 유예된 죽은 시간)'의 배치는 상당히 도전적이다. 디졸브는 본질적으로 두 개의 시공간이 두 이미지가 교차되고 비벼지며 짓무르는 물리적 전이일텐데, 류승완은 정보의 교환이라는 첩보물의 기능적 목적을 의도적으로 지연한다. 대신 취조라는 폭력의 시간이 한 인간의 육체와 정신을 어떻게 마모시키는가에 대한, 그 감각을 스크린 위에 눅진하게 눌러붙게 만든다. 이 길고 눅눅한 시간 속에서, 채선화의 핏기 엇은 얼굴은 단순한 정보의 매개체가 아니라 고통을 감각하는 실체로서 관객에게 육박해 온다. 첩보의 차가운 시계가 멈춘 그 데드타임의 자리에, 짓눌린 감정이 퇴적되어 가는 것이다.
이처럼 육체와 감정이 동시에 마모되는 극한의 마찰을 스크린 위에 담아내기 위해, 영화는 기어코 블라디보스토크라는 좌표를 향해 나아간다. 이 광활하고 서늘한 러시아의 국경 도시는 남북의 이념이 사라진 자리에 오직 자본의 탐욕만이 엉겨 붙어 있다. 비밀도 인간도 얼어붙는 이 공간에서 카메라는 두 가지 상반된 육체의 운동성을 집요하게 관찰한다. '목격자' 조 과장과 '행동자' 박건(박정민)이다. 조 과장은 길고 단단한 신체를 공간의 하중에 기댄 채 대상을 탐색한다. 과거 정보원을 눈앞에서 잃은 상흔을 안고 있는 그는, 타인과의 접촉을 최소화하려 애쓴다. 투병 중인 어머니의 약값을 미끼로 채선화를 정보망으로 포섭할 때조차 그는 철저히 관찰자의 거리를 유지하려 안간힘을 쓴다. 반면, 보위성 조장 박건은 머리보다 몸이 먼저 튀어나가는 인물이다. 취조실의 짙은 그림자 속에 반쯤 얼굴을 가린 채 국가의 임무와 개인의 사랑 사이에서 분열하던 그는, 선화가 위기에 처하자 요원이라는 단정한 외피를 벗어던진다. 돌이켜보면 류승완의 근작들이 어딘가 둔탁하게 느껴졌던 것은, 스크린 위에 구구절절한 설명과 명분이 늘어나면서부터였던 것 같다. 반면 <휴민트>는 다시금 류승완이 몸의 추동으로 돌아가려는 안간힘처럼 보인다. 오직 헤드라이트 불빛과 거친 총구의 화염만으로 칠흑 같은 어둠을 찢어발기며 인물들의 좌표를 드러내는 후반부 마피아 소굴의 총격전이 이를 영화적으로 증명한다. 특히 인신매매 현장에 놓인 방탄 투명 부스들을 활용한 액션 시퀀스의 설계는 꽤나 탁월하다. 바퀴가 달린 유리 부스들이 마찰음을 내며 미끄러지는 불규칙한 관성과 그 궤적을 예측하며 짐승처럼 오가는 인물들의 동선은 액션의 창의성을 넘어선다. 영화는 투명한 벽을 사이에 두고 단절되는 시야와, 액션과 액션 사이 절단된 호흡을 유기적 리듬으로 변주해 낸다. 다만 이 맹렬한 첩보전의 외피를 뚫고 들어가면, 영화가 종국에 도달하려는 목적지는 류승완의 방식으로 거칠게 직조해 낸 피비린내 나는 <화양연화>에 가깝다. 망각과 소멸은 기억 한 켠에 저장된 채, 인물들은 어딘가로 부유한다. 다시 오프닝의 모텔 방, 어둠 속에 홀로 앉아 있는 조 과장의 텅 빈 실루엣은 대단한 비장미나 영웅의 숭고함과는 거리가 멀다. 그것은 그저 참혹한 육체의 마찰을 온몸으로 통과해 낸 자의 방전 상태일 뿐이다. 물론 <휴민트>를 그의 최고작이라 부르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장르의 낡은 파편들이 부딪히는 불균질함 속에서도, 기어이 인물의 뼈와 살이 깎여나가는 물리적 피로감만큼은 정직하게 화면에 남겨두었다는 점에서 충분히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오랜만에 납득할 만한 종착지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