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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승호(2025 영화비평 공모 수상자)

<부고니아>: 결정론적 니힐리즘은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영화 <부고니아> 스틸컷 이미지



<부고니아>: 결정론적 니힐리즘은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장승호(2025 영화비평 공모 수상자)


<부고니아>(2025)를 보고 나서 가장 느끼기 쉬운 감각 중 하나는 어딘가 <지구를 지켜라!>(2003)와는 그 분위기가 묘하게 다르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영화의 제목에서부터 예비되는 측면이 있다. <지구를 지켜라!>의 제목이 병구(신하균)의 관점에서 발화되는 구어를 담고 있다면, <부고니아>는 죽은 소의 시체에서 벌이 탄생한다는 믿음, 더 나아가 그 소는 피를 흘리지 않는 방식으로, 다시 말하면 타박상에 의해 고통스럽게 죽어야 한다는 다소 잔인한 미신을 제목으로 삼아 그것을 정조준한다.


이런 영점은 인물을 바라보는 영화의 태도에도 그대로 투영된다. 먼저 <지구를 지켜라!>는 전통적인 멜로드라마의 전략을 차용하여 병구의 캐릭터성을 다층적으로 쌓아나간다. 그에게는 펠리니의 <길>(1954) 속 젤소미나(줄리에타 마시나)에 대응되는 순이(황정민)라는 동료가 있으며, 그는 학교와 기업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구조적 폭력의 희생자다. 그가 복수를 감행하는 대상인 만식(백윤식)은 이미 이름이 알려진 악덕 기업인이며 극의 시작부터 대리기사에게 정해진 요금을 지불하지 않는 그의 모습은 그 자체로 병구와 만식의 관계를 선악의 대비로 예견한다. 병구를 둘러싸고 있는 이 서사적 정념은 만식이 설령 외계인이 아니더라도 그 불온한 복수를 충분히 승인할 수 있을 것만 같다. 


영화 <부고니아> 스틸컷 이미지2


반면 <부고니아>의 경우 이런 멜로드라마적 기초가 검열되어 있는 듯하다. 병구와 순이의 이자 관계가 일종의 사적 정의를 위해 결성된 약자들의 연대라면 테디(제시 플레먼스)와 돈(에이든 델비스)의 관계는 테디가 가정 내에서 가부장적 지위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권력 구조에 가깝다. 그러나 영화 안에서 테디의 모습은 어른이라기보다는 음모론에 의존하는 소년에 가깝고, 지적 결손이 있는 돈은 소년이라기보다는 아동에 가깝다. 이 어설픈 가부장 구조는 너무나 허술해서 보는 이의 마음을 처연하게 만들 정도다.


테디가 미셸(엠마 스톤)에게 사적 복수를 시도하게 되는 동기 중 하나는 어머니 샌디(알리시아 실버스톤)의 임상시험의 실패이다. 하지만 <지구를 지켜라!>의 만식과 다르게 미셸은 샌디의 병원비 전액을 지원하고 표면적으로는 진심 어린 사과도 한다. 보통 사적 복수극에서는 복수자에게 그 윤리적 정당성이 담보되어야 관객이 몰입할 틈이 생기기 마련인데 테디의 복수는 그것을 정당화할 마땅한 도덕적 기반을 마련하지 못한다. 미셸이 테디에게 임상시험 부작용에 관해 사과하는 플래시백 장면에서 그는 그녀에게 한마디도 하지 못한 채 멍하니 그녀를 쳐다볼 뿐이다.


영화 <부고니아> 스틸컷 이미지3


<지구를 지켜라!>가 전통적인 음모론 스릴러의 외피 안에 멜로드라마적 정념을 삽입하여 복합성을 증대했다면, <부고니아>는 리메이크 과정에서 그 정념을 의도적으로 삭제하여 극의 방향을 훨씬 더 음모론적인 것으로 변형한다. 이 차이는 미셸이 테디에게 지구인 탄생의 비밀과 안드로메다인들의 의도를 설파하는 클라이맥스에서 극에 달한다. <지구를 지켜라!>에서 만식이 인류의 기원을 설명하는 장면은 플래시백과 함께 매끄러운 과거사를 구축하고 그 결과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1968)를 호출하는 형이상학적 쾌감을 창출하지만, <부고니아> 속 미셸의 설교는 언뜻 알아듣기조차 어렵다. 인류의 근원을 설명하고 있음에도 플래시백 없이 발화자의 얼굴과 웅변에만 초점을 맞춘 카메라, 빠르게 쏟아지는 문장, 그리고 그 문장을 타고 흐르는 격정의 세례에 두들겨 맞다 보면 인류의 시원을 이해한다는 형이상학적 쾌감보다는 얼얼함만이 남는다. 아마 테디도 그랬을 것이다. 


음모론 스릴러를 슬라보예 지젝이 분류한 고전적 하드보일드 플롯과 느와르 플롯의 변주로 보고 그 일반적 경로를 유형화한다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주변에서 편집증자 취급을 받던 인물이 주장하던 음모가 진실로 밝혀지는 경로 1(<화성인 지구정복>, 1988), 밀고 나가던 음모가 거짓으로 밝혀지지만 그 뒤에 있는 진짜 진실을 깨닫게 되는 경로 2(<차이나타운>, 1974), 그리고 어떤 진실도 밝혀지지 않으며 객석 자체를 음모론 집회 현장으로 만들어 버리는 경로 3(<JFK>, 1991)이 그것이다. 


영화 <부고니아> 스틸컷 이미지4


흥미로운 점은 <부고니아>의 길은 어떤 경로에도 딱 들어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테디와 샌디의 믿음, 즉 거대 제약회사가 자신들의 유전자 배열을 변형하려 한다는 것, 그리고 그들이 외계인이라는 것은 결국 사실로 밝혀진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경로 1에 해당될 정도로 그 예측이 진실인 것은 아니다. 테디의 사유는 사회 내 만연한 음모론과 뒤섞여 있으며, 그는 샌디의 죽음과 베이비시터 케이시(스타브로스 할키아스)에게 당한 성학대 트라우마로 타인의 의도를 공격적으로 해석하는 피해망상을 앓고 있다. 즉 외계인의 존재와 그들의 행위는 부분적으로 알아챘으나 그 방향을 악한 것으로 간주하는 왜곡된 통찰, 말하자면 진실하지만 감염된 인식이라는 저주에 빠진 것이다.


영화 <부고니아> 스틸컷 이미지5


결과적으로 테디의 궤적은 경로 1과 경로 2가 기형적으로 혼합된 것에 가깝고 그 목적지는 어떤 것도 할 수 없는 파국이다. 경로 1은 개인이 상황을 개선하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진실의 선각자라는 인식론적인 승리를 쟁취할 수 있다는 점에서 카산드라적으로 볼 수 있고, 경로 2는 개인이 자신의 오인과 책임을 깨닫고 그에 책임을 지며 추락하는 윤리적 결단을 단행할 수 있다는 점에서 오이디푸스적으로 볼 수 있다. 반면 테디의 경로는 인식론적인 승리도, 오인에 대한 책임도 질 수 없다. 감염된 인식에 근거한 테디의 손에 쥐어질 수 있는 건 혼란과 환멸뿐이다. 즉, 란티모스는 테디에게 관객이 이입할 수 있는 멜로드라마 주인공의 자리도, 카산드라의 자리도, 오이디푸스의 자리도 양보하지 않고 가부장이 되려 하는 그의 소망을 시작부터 끝까지 조소한다. 그 결과 <부고니아>는 혼란스럽지만 긴장은 없는 기이한 부조리극으로 전락한다.


영화 <부고니아> 스틸컷 이미지6


란티모스는 여지껏 서사의 틀을 그리스 비극 혹은 신화에서 빌려오면서도 인물들에게 그 끝을 결정지을 비극적 영웅의 지위를 부여하지 않았다(거의 유일한 승리로 분류되는 <가여운 것들>(2023)의 경우도 온전한 승리라 부르기 어렵다. 아버지 알피(크리스토퍼 애벗)를 살해하고 벡스터 박사(윌렘 데포)의 뒤를 잇는 벨라(엠마 스톤)의 모습은 가부장제 바깥을 향하는 영웅이라기보다는 아버지의 자리를 승계(찬탈)한 대체 가부장에 가깝기 때문이다). 란티모스의 인물들은 언어, 섹슈얼리티, 생명 등을 통제하는 가부장적 혹은 초월적 구조를 갈구하거나 그에 대항한다. 그러나 그들의 대항은 대개 외부 요인에 의해 실패하거나 갑작스레 끝나는 영화에 의해 중단되기 일쑤다. 그렇게 수많은 실패를 쌓아가며 란티모스는 여기까지 왔다. 여기서 궁금증은 한 가지다. 이미 활용할 수 있는 각종 억압의 구조를 수없이 동원한 란티모스는 남은 필모그래피도 실패할 자들을 관찰하는 니힐리즘적 실험으로 채워갈 수 있을까? 사용할 수 있는 실패의 재료가 모두 소진되고 나면 그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때가 되면 그는 이 유사 비극이 아닌 진짜 비극으로 도약해야만 하지 않을까? 그 순간을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