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윤 평론가
| <씨너스 : 죄인들> - 혼성과 에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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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씨너스 : 죄인들> - 혼성과 에너지 이동윤 (부산영화평론가협회) 스모크와 스택 형제가 세운 주점의 낡은 나무 무대 위. 새미가 찰리 패튼의 레조네이터 기타를 안고 마이크 앞에 선다. 아버지를 향해 지은 곡 'I Lied to You'의 첫 줄을 거칠게 뜯어내는 순간, 1932년 미시시피 델타의 물리적 시공간은 가차 없이 찢겨 나간다. 어쿠스틱 블루스의 끈적한 선율은 곧장 시간을 수백 년 거슬러 올라가 서아프리카 부족의 투박한 북소리와 엉겨 붙는다. 이어 카메라는 맹렬한 속도로 과거에서 미래마저 그 현장으로 소환한다. 날카로운 일렉트릭 기타의 파동이 고막을 찢고 들어옴과 동시에 턴테이블을 긁어대는 힙합 디제이의 거친 비트 위로 브레이크 댄서들의 땀 밴 육체가 흙바닥을 뒹군다. 여기에 중화풍 무희들의 춤사위와 이질적인 경극 음악의 파편들까지 거침없이 난입한다. 아프리카의 원초적 리듬, 남부의 블루스, 미래의 록과 힙합, 동양의 낯선 선율. 이 파편화된 시공간의 조각들은 새미의 피 끓는 보컬 아래서 기어코 하나의 거대한 생명체로 피를 섞는다. 스크린 위에서 벌어지는 이 기묘한 혼성은 폭력적일 만큼 강렬하다. 이 장면이 라이언 쿠클러의 <씨너스 : 죄인들>(2025)에서 가장 인상적인 순간일 것이다. 물론 쿠클러는 좀 더 흥미로운 개념을 제안하고 있는 듯 하다. 이 혼성의 동력이 위에서 아래로 내리누르는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밑바닥에서부터 들끓어 오르는 원초적인 육체의 파동에 있다는 점이다. 낮 시간, 아버지가 연단에 세워 성경 구절을 암송하게 했던 억압된 종교적 의식과 달리, 주점의 블루스는 누구의 강요 없이도 사람들의 살갗을 진동시키며 그들을 춤추게 한다. 이 영화에서 블루스는 단순한 음악을 넘어, 억압받는 육체들이 스스로를 구원하기 위해 선택한 진짜 종교의 지위를 획득한다. 이처럼 <씨너스 : 죄인들>은 혼성의 경계를 스스로 부서내는 방식을 채택한다.
이 압도적인 무당거리에 도달하기 전까지 영화가 첫 1시간 동안 집요하게 매달리는 것은 1930년대 흑인 공동체의 끈적한 육체성을 직조하는 일이다. 시카고에서 델타로 돌아온 스모크스택 쌍둥이 형제가 제재소 부지를 사들이고 낡은 건물을 주점으로 개조하며 식료품점에서 달러와 농장 화폐를 교환하는 일련의 과정들은 대단히 건조하고 구체적인 노동의 감각으로 묘사된다. 카메라는 인물들의 피부에 맺힌 땀방울과 흙먼지 날리는 거리, 그리고 그 시대의 비루한 생존의 무게를 현미경처럼 들여다본다. 짐 크로우 시대의 현실적인 중력 위에 흑인과 이민자, 밀수해 온 자본이 뒤섞이는 이 묵직한 전반부는 후반부에 들이닥칠 초자연적 설정을 지탱하기 위해 감독이 사활을 걸고 다져놓은 단단한 물리적 지반이다. 그러나 이 단단했던 영화의 밀도는 아일랜드 포크송을 부르며 백인 흡혈귀 레믹 일당이 주점 밖으로 난입하는 순간부터 급격한 궤도의 수정을 겪는다. 새미의 맹렬한 블루스 파동이 기어이 괴물들을 불러들였다는 역설적 설정과, 뱀파이어를 흑인 문화를 착취하고 동화시키려는 주류 백인 자본의 은유로 치환한 발상 자체는 무척 서늘하다. 그들은 단순히 피를 갈구하는 짐승이 아니라 영생과 부를 미끼로 흑인들이 간신히 구축해 낸 해방의 공간을 침범하려 든다.
문제는 거대한 사회적 은유가 크리처 슬래셔라는 장르의 관습과 물리적으로 충돌하면서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서사적 텐션이 눈에 띄게 감속되는 점에 있다. 나무 말뚝과 마늘, 은으로 된 기타 원반이 무기로 등장하고 살을 물어뜯는 후반부의 난전 속에서 전반부가 공들여 쌓아 올렸던 그 현실적인 흑인의 육체성은 점차 슬래셔 장르의 소품으로서 기능하기 시작한다. 주술과 피가 난무하는 판타지적 쾌감이 극을 견인하려 애쓰지만 상반된 두 장르는 끝내 완벽하게 혼용되지 못한 채 스크린 위에서 다소 간 이질감을 보여준다. <씨너스: 죄인들>은 섞일 수 없는 피와 땀을 억지로 한데 쏟아붓고 그 마찰 과정을 지켜보는 기이하고 거친 실험실에 가깝다. 흑인 역사의 상흔과 델타 블루스의 영성, 그리고 피 튀기는 뱀파이어 액션은 끝내 하나의 매끄러운 텍스처로 융합되지 못하고 종종 겉돈다. 서사와 장르가 교합하는 이음새마다 파열음이 들리고 후반부의 액션 시퀀스는 인물들이 지녔던 짐승 같은 생동감을 소모시키고 있다. 다만 이를 불균질함으로 치부하기엔 화면 곳곳에 놓여진 야성적 에너지가 소모될 조짐이 보이지 않는다. 아마도 쿠클러는 흑인 문화의 기원과 그들을 향한 착취의 역사를 스크린 위에 핏빛으로 짓이겨 새로운 방식의 개념을 재창조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비록 모든 파편이 제자리를 찾아 완벽한 그림을 완성하진 못했을지언정, 서로 다른 질감의 세계가 부딪히며 만들어낸 그 거친 찰과상만큼은 영화가 끝난 뒤에도 쉽게 아물지 않고 선명한 자국을 남긴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