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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승호(2025 영화비평 공모 수상자)

이탈한 곳에 낙관이 있다, <프로젝트 헤일메리>
영화 <프로젝트 헤일메리> 스틸컷 이미지



이탈한 곳에 낙관이 있다, <프로젝트 헤일메리>


장승호(2025 영화비평 공모 수상자)


엔딩 크레딧이 올라간 뒤 극장을 나서며 <프로젝트 헤일메리>(2026)의 흠결을 복기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가장 먼저 도드라지는 실책은 상영 내내 피로감을 유발할 정도로 과용되는 사운드트랙이다. 반복적으로 삽입되는 해리 스타일스의 <Sign Of The Times>(2017)가 고립된 헤일메리 호라는 공간을 연대의 장으로 전환하는 것만은 분명하지만, 하드 SF 장르가 대중음악의 정서에 손쉽게 기대는 순간 우주라는 공간성과 과학적 엄밀함은 상대적으로 퇴색될 수밖에 없다.


무릇 우주를 배경으로 한 영화의 가장 큰 이점 중 하나는 텅 빈 심연을 통해 극의 리듬을 유연하게 변주할 수 있다는 것에 있다. 폐쇄적인 함선 내부와 광활한 암흑을 시각적으로 대비시키는 것만으로도 관객에게 충분한 감각적 전율을 선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공간 특유의 질감을 부연하는 앰비언스나 스코어가 적절히 배치될 때 그 효과는 극대화된다. 그러나 <프로젝트 헤일메리>는 이런 장르적 이점들을 스스로 소거하고 있는 듯하다. 도입부부터 결말에 이르기까지 공백을 허용치 않고 극장 안을 빼곡히 메우는 OST들은, 서사의 휴지기마다 관객이 지루함을 느낄까 노심초사하며 그들을 달래려는 보모의 강박처럼 느껴질 정도다.


또한 <프로젝트 헤일메리>는 원작의 핵심 기제와 결별함으로써 본연의 매력을 스스로 삭감한 채 위태로이 출항한다. 영화는 혼수상태에서 기억상실을 안고 깨어난 그레이스가 정적만이 감도는 우주선 안에서 이곳이 어디인지, 그리고 자신은 또 누구인지를 역추적하는 과정으로 그 서문을 연다. 그에 따라 <프로젝트 헤일메리>는 필연적으로 임무 수행이라는 과업 중심 플롯과 자아의 발견이라는 인식론적 플롯이 병치될 수밖에 없는 구조를 띠게 된다. 


영화 <프로젝트 헤일메리> 스틸컷 이미지2


원작은 이 두 축을 잇는 고리로 과학적 추론을 활용한다. 그레이스가 임무 수행 중 각종 단서를 활용하여 가설을 세우고, 이를 트리거 삼아 기억의 파편을 복구하는 퍼즐 풀이에 독자를 능동적으로 참여시키는 것이다. 예컨대, 바닥의 핏자국에서 ‘Thin Red Line’이라는 기억 속 메일 제목을 연상하거나, 진자를 이용해 계산한 중력으로 이곳이 우주임을 깨닫게 되는 순간이 대표적이다. 우주라는 공간, 그리고 자신이 과학에 해박하다는 자각은 곧장 기억을 점화하는 불꽃이 되어 대학 시절 마리사와 페트로바 선에 관한 대화를 나눴던 순간을 지금 여기로 소환한다. 이처럼 가설 설정과 실험, 그리고 그것이 발굴해내는 기억의 회로는 곧 원작의 서스펜스와 카타르시스를 지탱하는 핵심 동력이 된다.


그러나 영화는 그레이스가 자신의 상황에 의문을 품는 순간만을 포착할 뿐, 추론의 방법론이나 가설 수립의 공정은 상세히 시각화하지 않고 생략하는 전략을 택한다. 대신 그 자리에 침투적인 플래시백을 배치하여 그레이스의 과거사를 관객에게 노골적으로 제시한다. 그런데 만약 주인공이 어떤 논리적 결착에 도달하기도 전에 과거의 기억이 무상으로 제공된다면, 서사 내에서 그의 과학자라는 지위는 대체 왜 필요한 것인가? 영화는 과학적 절차에 입각하여 난관을 타개하는 주인공을 내세우고도 정작 그 절차가 제공하는 장르적 쾌감에는 무심한 듯 보인다. 


더욱 난감한 것은 서사를 지탱하는 주요한 과학적 전제의 배제다. 원작에서 그레이스가 헤일메리호의 선원으로 선발된 결정적 이유였던 ‘코마 저항성 유전자’라는 매혹적인 설정은 사라지고 영화는 그의 선발 근거를 사고로 인한 대타라는 우연에 전적으로 기댄다. 기억상실의 원인 역시 마찬가지다. 원작에서 스타렛은 그레이스가 강제로 탑승 당한 사실을 알아채면 임무 수행을 거부할 것으로 예상하고 기억상실 효과가 있는 심문용 약물을 투약한다. 임무가 한창일 때 뒤늦게 자각되는 진실의 충격은 이 소설의 백미라 할 수 있는데, 영화는 기억상실의 원인을 끝내 밝히지 않고 어물쩍 넘어가고 만다. 말하자면 원작이 구축해 놓은 SF적 엄밀함의 매력을 스스로 거세한 셈이다.


요컨대 원작이 영화로 번안되는 과정에서 작품을 지탱하는 과학적 전제와 연구 문제를 설정한 후 논리적 가설 수립 및 경험적 검증으로 이어지는 지적 유희의 중핵이 상당 부분 적출된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1인칭 시점의 문제 해결적 접근이 앤디 위어의 서사를 지탱하는 매력의 대부분이라는 사실이다. 그의 작품이 여타 SF와 차별화되는 지점은 인물들이 공유하는 특유의 낙천성에 있는데, 이 낙천성은 막연한 긍정이 아니라 과학이 제공하는 방법론적 타당성에 근거한다. 즉, 눈앞에 난관이 존재하긴 하지만 과학적 공정과 논리적 절차를 충실히 따른다면 분명 극복해 낼 수 있다는 믿음이 그 낙천성을 형성하는 것이다. 주인공과 독자, 그리고 관객은 이 과학적 방법론에 자신을 투사하고 동일시함으로써 절망적 상황 속에서도 낙관의 끈을 놓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영화는 그 방법론적 절차를 상세히 탐구하기보다는 주인공이 상황을 척척 해결하는 식으로 장면을 구성하여 관객을 소위 능력주의 포르노의 구경꾼으로 만든다. 특유의 낙천적 분위기에 편승할 수는 있지만 우리는 방법론적 절차와 공명할 수 없으므로 그레이스가 왜 저렇게 낙천적인지 결코 깊이 이해할 수 없다.


이런 점들을 고려하면 하드 SF 영화로서 <프로젝트 헤일메리>는 영화사적 계보에서 자신의 고유 좌표를 확보하기 어려워 보인다. 이 영화는 <스타워즈: 새로운 희망>(1977)과 같은 장엄한 서사시적 세계관을 구축하는 것도, <인터스텔라>(2014)처럼 과학적 엄밀성을 통해 시간의 숭고에 접근하는 것도 아니다. <하이 라이프>(2018)나 <블레이드 러너>(1982)가 집요하게 파고들었던 우주에 던져진 존재라는 실존적 조건에 집중하는 것도, <에이리언>(1979)이 형상화했던 코스믹 호러의 서늘함을 겨냥하는 것도 아니다. <프로젝트 헤일메리>는 SF 영화의 외양을 띠고 있지만, 어딘가 모르게 SF가 아닌 다른 것의 냄새를 풍기는 듯하다.


동시에 다시 떠오르는 의문은 다음과 같다. 하드 SF의 장르적 매력을 확보하지 못하는 이 영화가 대중의 열렬한 지지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어쩌면 이 작품은 관객들에게 SF 장르가 아닌 다른 어떤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프로젝트 헤일메리>를 SF라는 안경을 착용한 채 바라보는 것은 다소 무용한 일이 될지도 모른다. 즉, 역으로 하드 SF가 아닌 다른 장르로써 <프로젝트 헤일메리>가 택한 행로를 살펴보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 될 것이다. 


영화 <프로젝트 헤일메리> 스틸컷 이미지3


가벼운 위트와 유머러스한 분위기, 그리고 끊임없이 흐르는 팝송들은 <프로젝트 헤일메리>의 공간을 고독한 항해의 장소가 아닌 유쾌한 관광 혹은 여행의 장소로 치환한다. 그리고 그 투어의 백미는 이종 개체인 로키와의 조우이다. 여기서 영화는 원작의 만남 속 과학적 절차보다는 만남과 조우라는 사건 자체에 집중한다.


우선 유사하면서도 다른 사례로 드니 빌뇌브의 <컨택트>(2016)와 비교해 보자. 언어학자인 루이스는 지구에 방문한 외계인 헵타포드와의 접선을 통해 그들의 언어를 학습한다. 여기서 언어는 곧 그 개체가 물리적 현실, 더 나아가 시간과 관계하는 방식과 연동되며 헵타포드의 언어를 학습함에 따라 루이스는 그들과 유사한 방식으로 세계를 경험하게 된다. 그렇게 언어의 인식론이 시간의 존재론을 뒤바꾸는 순간, 우리는 지적인 즐거움을 넘어 어떤 숭고의 영역에 도달한다. 


반면 <프로젝트 헤일메리>는 로키의 언어를 번역하는 과정을 몇몇 도약적인 이미지들로 손쉽게 넘어간다. 그레이스가 로키가 내는 화음을 가청 주파수이지만 인간과는 다른 음성 소통 방식으로 추정하는 과정, 시계를 통해 에리디언의 시간 단위를 측정하고 이를 음성 통역의 기초로 삼는 단계, 마지막으로 여러 주파수의 화음을 분리하여 컴퓨터 그래픽으로 구현하는 절차 등은 스쳐 가는 이미지들의 나열 속에 휘발되어 버리고 만다.


영화 속 로키와의 만남은 하드 SF 특유의 지적 전율보다는 스티븐 스필버그의 <미지와의 조우>(1977)가 선사했던 고전적 설렘을 환기하는 쪽에 가깝다. <미지와의 조우>의 클라이맥스에서 인간들이 외계인의 신호를 유아적으로 모사하는 장면을 떠올려 보자. 이는 <컨택트>식의 엄밀한 언어적 대화라기보다는 일종의 옹알이에 가깝다. 이 소통의 본질은 구체적인 메시지의 전달이 아니라 미지의 대상을 향해 우호적 의도를 전달하는 것, 그리고 그로써 그들과 교감하고자 하는 순수한 갈망에 있다. 즉, 이 장면을 지배하는 정념은 어떤 쾌감이 아니라 미지의 존재와 맞닿는 순간의 두근거림, 다시 말해 모험적 교제가 주는 기쁨 어린 경외감인 것이다. 


이 지점에서 <프로젝트 헤일메리>는 하드 SF가 아닌 SF의 탈을 쓴 버디무비로 선회한다. 영화 속 로키는 원작이 강조했던 빼어난 과학자의 모습보다는 낯선 존재임에도 무조건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유능한 조력자 혹은 단짝 친구의 위치로 재설정된다. 과학적 엄밀함보다는 정서적 유대감에 방점을 둔 셈이다.


그리고 영화의 끝에 이르러 <프로젝트 헤일메리>는 원작과 다소 다른 방향으로 흐른다. 원작이 그레이스의 1인칭 시점을 고수하며 지구의 구원을 태양의 광도가 회복되었다는 관측 결과를 통해 간접적으로 암시했다면, 영화는 20년 뒤 지구에 그레이스가 보낸 무인 우주선이 도착하고 희망찬 재건이 시작되는 순간을 직접적으로 시각화한다. 이런 연출은 얼핏 <아마겟돈>(1998)을 위시한 지구를 수호하는 희생적인 남성 영웅이라는 헐리우드의 전형적 도상을 연상시키지만, 자세히 보면 그것과는 다소 다른 논리로 흘러가는 듯하다. 그레이스는 지구 내에 마땅한 가족이나 연고가 없는 인물이다. 그러므로 그레이스가 지구로 돌아가지 않고 로키의 구조를 감행하는 일은 비장한 순교보다 자발적으로 자신의 실존 영역을 확장하는 것에 가깝다. 결국 지구 시퀀스의 삽입을 통해 강화되는 것은 그의 영웅적 위업이 아니다. 되려 그것은 정신적으로 성숙해진 그레이스가 머나먼 타지에서 지구의 동료 스타렛에게 보내는 다정한 답장이자 우정의 연대기 위에 찍는 마침표인 것이다.


결국 <프로젝트 헤일메리>는 하드 SF의 장르적 즐거움을 다소 거세한 자리에 동화적 분위기를 덧대어 한 편의 버디무비를 직조해낸다. 이러한 각색과 변주는 훗날 이 작품이 SF 영화의 정전에 편입되는 것을 가로막는 요인이 될 것이다. 이런 몇 가지 사유로 인해 나는 미학적으로는 <프로젝트 헤일메리>를 지지하기 어렵다. 그러나 그럼에도 여전히 마음 한편에서 이 영화가 애틋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전쟁과 폭력이 실시간으로 중계되고 다큐멘터리와 극영화가 세계의 비극을 실어 나르는 작금의 시대에, 우주를 심미적 동화의 공간으로 전용한 이 나이브한 버디무비를 나는 끝내 밀어내지 못하겠다. 원작의 정교함과 선대 SF들의 성취에 비하면 헐겁기 그지없는 이 영화에게 형성되는 역설적인 끌림 앞에서 나는 프레스턴 스터지스의 <설리반의 여행>(1941)을 떠올린다. 


극 중 설리반은 고통이라는 삶의 진실을 폭로하는 리얼리즘만이 예술의 소명이라 믿던 시나리오 작가다. 호화로운 저택에 살던 그는 직접 거리로 나가 사람들의 고통을 경험해보고 이를 예술로 표현하겠다는 담대한 계획하에 여행을 떠나지만 그 과정에서 살인 사건에 휘말려 억울한 옥살이를 하게 된다. 그러던 중 하루는 감옥에서 형벌 노동을 끝내고 다른 죄수들과 함께 교회에서 상영하는 영화를 보게 되는데, 그는 이때 죄수들을 보고 깊은 충격에 빠진다. 삶이 퍼붓는 고단함에 짓눌려 있던 수형자들의 얼굴이 희극 영화를 볼 때만은 어린아이처럼 생글거리는 웃음으로 가득 차올랐던 것이다. 아마도 그들에게 영화란 삶의 고통을 꿈 같은 정동으로 잠시나마 덮어주는 정신적 이불과 같은 것이었으리라. 그러니 세상에는 진실의 단면을 드러내는 실재의 영화뿐만 아니라, 맹목적 낙관을 흩뿌려 이 비루한 삶을 멈추지 않고 며칠 더 연장하도록 하는 삶의 영화 또한 필요한 것 아닐까. <프로젝트 헤일메리>가 아무리 허점이 많은 영화라고 한들, 이를 미워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인간의 삶에는 여전히 이처럼 허술한 낙관이 필요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