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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윤 평론가

<햄넷> - 상실과 복원의 무대
영화 <햄넷> 포스터 이미지



<햄넷> - 상실과 복원의 무대


이동윤 (부산영화평론가협회)


흙먼지가 가라앉은 자리에 무엇이 남을까. 클로이 자오의 <햄넷>을 보는 내내 셰익스피어라는 거대한 이름에 짓눌리기보다는 그 이름표를 조용히 떼어내고, 주변부의 공기만을 남기려 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돌이켜보면 클로이 자오는 전작인 <노매드랜드>(2020)와 <로데오 카우보이>(2017)를 통해 상실이 휩쓸고 간 폐허를 묵묵히 걷는 사람들의 얼굴을 응시해 왔다. 길 위의 방랑자들을 비추던 그녀의 카메라는 이제 16세기 영국의 눅눅하고 어두운 숲으로 방향을 튼다.


아마도 이 작품이 가닿으려는 목적지는 육체라는 원형이 파묻히는 터전인 듯 하다. 생이 태어나고 다시 돌아가는 그 단단한 토양으로부터 출발하는 <햄넷>은 아그네스가 거대한 나무의 텅 빈 구멍 사이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오프닝에서부터, 카메라는 그녀의 손톱 밑에 낀 흙과 거친 숨소리에 짐짓 시선을 멈춰 세운다. 흙냄새를 풍기며 땅에 단단히 발을 붙인 여자와, 어딘가 활자의 세계를 부유하는 듯한 남자. 직관과 은유, 육체와 관념. 그렇기에 이 둘의 결합은 애초부터 전혀 다른 세계가 만나 다소 기이한 밸런스를 위태롭게 유지하고 있었던 것처럼 보이기까지 하다.  


영화가 이를 위해 가닿는 것은 과감한 생략과 축약이다. 이를 테면 아그네스가 두 쌍둥이를 낳은 직후 수년의 시간이 흐르는 것이 대표적인데, 클로이 자오는 이를 통해 선형적으로 작동하는 세계가 아닌 징후로서의 물리적 체감을 보다 전면에 내세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파편화 된 작동축이 급작스레 전환점을 맞게 되는 것은 아들 햄넷의 죽음이다. 클로이 자오가 트라우마를 들이미는 방식은 다소 폭력적으로 보일 만큼 선명화 작업을 거친다. 특히 제시 버클리의 오열은 감정을 쏟아낸다는 표현이 부족할 정도로 격렬하게 몸을 내던지는 연기의 완성도를 보여주는데, 아그네스가 슬픔을 표현하는 방식이 비록 정제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이는 인간을 넘어 짐승의 비명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자오의 전작들에서 탁 트인 광야를 유려하게 훑어내던 카메라가 이제 인물들의 짓눌린 감정 곁에 숨 막히도록 바짝 엎드리는데, 그 좁고 캄캄한 프레임 안에서 이들은 상실을 극복하지 않는다. 다만 그 썩어 들어가는 시간 한가운데 갇힌 채 그저 꼼짝없이 앓으며 버텨내는 과정을 묘사하고 있다. 


영화 <햄넷> 스틸컷 이미지


이를 통해 귀결하는 것은 마지막 햄릿 연극 시퀀스다, 극의 클라이막스를 아우르는 이 22분은 이 영화가 당도하려 했던 다소 생경한 종착지처럼 느껴진다. 아그네스가 찾아간 글로브 극장의 무대 장치는 화려한 왕궁이 아니라 어쩐지 그녀가 워릭셔에서 매일같이 맴돌던 그 텅 빈 나무 형상과 묘하게 겹쳐진다. 누구나 결국 흙으로 돌아간다는 쓸쓸한 관성이 그 조악한 가짜 무대 위에도 은근하게 덧칠해져 있는 것이다. 


연극 ‘햄릿’이 상연되는 동안 카메라는 극장 안의 시공간을 세 개의 층위로 기묘하게 분할해 낸다. 무대 뒤 어둠 속에서 유령의 가면을 쓴 채 숨을 죽이는 윌리엄의 시점, 무대 한가운데서 죽은 햄넷의 이름을 뒤집어쓰고 펄떡이는 소년 배우의 시점, 그리고 가장 낮은 객석 앞줄에서 이 이질적인 광경을 올려다보는 아그네스의 시점이다. 그중에서도 객석에서 무대를 올려다보는 아그네스의 시야각은 스크린 밖 우리의 시선과 조용히 포개지며 꽤나 서늘한 감각을 전해준다.


현실에서는 아들이 죽고 아비가 살아남았지만, 저 무대 위에서는 죽음을 떠안은 아비(유령)가 살아남은 아들(햄릿)의 주위를 맴돈다. 유령이 어둠 속에서 "나를 기억하라"고 읊조릴 때, 그것은 그럴싸하게 쓰인 픽션이라기보다 객석의 아내와 죽은 아들을 향해 제 살을 깎아 바치는 어떤 처절한 고해성사처럼 다가온다.


영화 <햄넷> 스틸컷 이미지2


이 기나긴 시퀀스가 진정 기이해지는 지점은 소년이 무대 위에서 최후를 맞이할 때다. 소년이 쓰러지는 찰나, 영화는 돌연 연극의 흐름을 지연시킨다. 무대를 향하던 카메라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극장을 메운 관중들의 정면을 빤히 응시한다. 수백 명의 사람들이 죽어가는 소년을 향해 일제히 손을 뻗는 그 찰나의 순간. 그것은 단순한 관극의 리액션이라기보다, 어쩌면 각자의 가슴속에 묻어둔 잃어버린 이름들을 무대 위로 조심스레 불러내는 집단적인 강령술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 순간 수백 명의 관객은 또 다른 아그네스가 되기도, 혹은 무대 위의 햄릿이 되기도 하는, 처연한 확장의 감각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자신을 둘러싼 무수한 손길들 속에서 아그네스는 무대 뒤편의 윌리엄을 바라보고, 마침내 죽은 아들의 환영이 스크린을 채우는 클로즈업과 마주한다. 시선이 얽히는 이 대목에서 그것이 슬픔의 반대급부인지, 시선 교환과 확인을 통한 안도인지는 확언하기 어렵다. 다만 흙구덩이에 묻혔던 아이의 이름이 가짜 무대 위에서 부활하는 이 과정은, 픽션이라는 껍데기가 어떻게 누군가의 살갗을 빌려 간신히 숨을 쉬게 되는지를 조용히 증명하는 것만 같다. 영화가 끝나고 난 뒤에도 무엇 하나 또렷하게 회수되었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오히려 스크린을 맴돌던 그 축축한 흙냄새와 거대한 나무의 원형적 성질, 허구와 현실이 부딪히며 내는 덜컹거리는 파열음들이 꽤나 오래도록 머릿속을 배회할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