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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지애 (2024 영화의전당 영화평론대상 수상자)

<주희에게> : 영화가 되지 못한 것들의 기록
영화 <주희에게> 스틸컷 이미지



<주희에게> : 영화가 되지 못한 것들의 기록


장지애 2024 영화의전당 영화평론대상 수상자


<주희에게>는 처음부터 하나의 완결된 다큐멘터리로 출발하지 않는다. 이 작품은 특정한 현실을 포착하고 이를 일관된 서사로 조직하려는 통상적인 다큐멘터리의 경로를 따르기보다, 애초에 그러한 경로에 진입하지 못한 채 남겨진 어떤 것들—중단된 기록, 실패한 시도, 끝내 수렴되지 않는 관계—위에서 작동한다.


이때 영화를 구성하는 것은 하나의 중심 서사가 아니라, 각기 다른 방향으로 흩어지는 개별 인물들의 실패이다. 중요한 것은 이 실패들이 단순히 개인적 좌절로 환원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것들은 서로 다른 층위에서 발생하지만, 서로를 비추며 이 영화가 왜 하나의 완결된 형식으로 수렴될 수 없는지를 설명하는 구조적 요소로 기능한다.


영화 <주희에게> 스틸컷 이미지2


우선 성필의 실패는 이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영화가 되지 못함’의 가장 노골적인 형태로 드러난다. 그는 분명 어떤 장면들을 모으고, 누군가를 기록하며, 그것을 하나의 서사로 엮어내려 했던 인물이다. 그러나 그 시도는 완성이라는 지점에 이르지 못한 채 중단된다. 성필이 마주한 한계는 외부 조건이 아니라, 오히려 타인을 포착하려는 시선 자체가 더 이상 지속될 수 없는 순간에서 발생한다. 그가 시도했던 것은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 타인의 삶을 일정한 의미와 구조 속에 배치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바로 그 지점에서 균열이 발생한다. 타인을 이해 가능한 이야기로 정리하려는 순간, 그 인물은 지나치게 단순화되거나 왜곡될 위험에 놓이게 되고, 성필은 그 긴장을 끝내 해소하지 못한 채 멈춰 선다. 이 때문에 성필의 영화는 ‘미완성’이라기보다, 애초에 완성이라는 형태로 수렴될 수 없는 시도였다고 보는 편이 더 정확하다. 


영화 <주희에게> 스틸컷 이미지3


이에 비해 철규의 실패는 단순히 신체적 제약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그는 중증 와상 장애인이라는 조건 속에 놓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상보다 더 분명한 의사 표현과 선택의 흔적을 드러내며, 일정한 방식으로 관계에 개입하려는 주체성을 보여준다. 바로 이 지점에서 철규를 둘러싼 상황은 더 복잡해진다. 문제는 그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가 ‘아니’라는 데 있다. 오히려 무언가를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가능성이 충분히 확장되지 못하는 상태—여기에서 그의 실패가 발생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철규의 번지점프 도전은 그의 위치를 가장 집약적으로 드러내는 장면이라 할 수 있다. 중증 장애인의 신체 조건을 고려할 때, 번지점프는 단순한 체험을 넘어서는 사건이다. 그것은 물리적 한계를 넘어서는 시도이자, 동시에 자신이 세계와 관계 맺는 방식을 일시적으로 전복하려는 몸의 선택에 가깝다. 철규는 이 도전을 통해 더 이상 보호되거나 제한되는 존재로 머무르지 않고, 스스로 어떤 행위를 선택하는 주체로 나아가려 한다. 


그러나 또 다른 층위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번지점프라는 행위는 표면적으로는 ‘능동적 선택’처럼 보이지만, 그 실행 과정은 철저하게 타인의 도움과 장치에 의존한다. 철규의 결심이 실제 행위로 이어지기까지의 모든 과정은 외부의 지원 없이는 성립할 수 없다. 이로 인해 그의 도전은 완전한 자기 결정으로 환원되지 않으며, 동시에 단순한 수동성으로도 설명되지 않는 이중적인 상태를 형성한다. 


영화 <주희에게> 스틸컷 이미지4


이러한 사건은 철규의 주체성을 증명하는 동시에, 그 주체성이 어디까지 확장될 수 있는지를 명확히 드러낸다. 그는 끊임없이 자신의 몸을 통해 세계와 접촉하려 한다. 그러나 그 모든 움직임은 일정한 경계 안에서만 가능하며 그 경계를 완전히 넘어서는 순간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따라서 그의 번지점프 시도는 어떤 극복의 서사라기 보다는 변화가 구조적으로 지속될 수 없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균열의 순간을 드러낸다. 


철규의 번지점프는 오히려 성필의 실패와 더 깊은 층위에서 접속한다. 성필이 타인을 하나의 영화로 조직하려는 시도 끝에 멈춰 섰다면, 철규는 자신의 삶을 하나의 변화된 상태로 이행시키지 못한 채 되돌아온다. 전자는 재현의 실패이고, 후자는 행위의 지속 불가능성이지만, 둘 모두 어떤 전환이 끝내 성립하지 않는 지점에서 교차한다. 그리고 바로 이 ‘전환의 불가능성’이야말로 이 영화 전체를 규정하는 핵심적인 조건이다.


이러한 개별 실패들을 단순히 병렬적으로 놓고 보면, 이 작품은 여러 인물의 좌절을 나열하는 구조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영화는 이 실패들을 각자의 자리에서 독립적으로만 존재하게 두지 않는다. 하나의 실패는 다른 실패를 설명하거나 보완하는 것이 아니라, 다시 말해 단지 실패한 자들의 연대가 아니라 이들의 실패가 왜 발생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반영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이때 핵심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관찰의 위치’ 자체가 안정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다. 성필은 타인을 서사화하려다 실패하고, 철규는 자신의 행위를 지속 가능한 변화로 연결시키지 못하며, 주희는 하나의 고정된 인물상으로 수렴되지 않는다. 그런데 이 각각의 불가능성은 서로 다른 원인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공통적으로 타인을 하나의 일관된 의미 구조 안에 배치하려는 시도 자체가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조건에서 발생한다. 다시 말해, 이 영화가 보여주는 것은 인물들의 실패가 아니라, 실패를 발생시키는 어떤 ‘구조적 불일치’이다. 


여기서 중요한 균열은 ‘이해’라는 행위에서 발생한다. 성필의 경우, 이해는 곧 서사화의 욕망으로 이어지고, 철규의 경우 이해는 관계의 지속 가능성에 대한 기대로 전환된다. 그러나 이 두 경우 모두에서 이해는 결국 어떤 안정된 결과로 이어지지 못한다. 이해하려는 시도는 오히려 대상의 복잡성을 단순화하거나, 관계의 비대칭성을 더 선명하게 드러낼 뿐이다. 따라서 이 영화에서 이해는 해결의 수단이 아니라, 오히려 실패를 가속하는 방식으로 작동하는 행위에 가깝다.


영화 <주희에게> 스틸컷 이미지5


이 지점에서 주희의 위치가 중요해진다. 주희는 성필의 서사 안에서도, 철규의 관계망 안에서도, 그리고 어떤 단일한 해석의 틀 안에서도 끝내 고정되지 않는다. 그는 중심에 있는 인물이라기보다, 오히려 다양한 시도들이 집중되는 지점에서 계속 미끄러져 나가는 존재다. 이 미끄러짐은 단순한 서사적 불안정성이 아니라, 이 영화가 어떤 인물도 하나의 의미로 수렴시키지 못하게 만드는 핵심적인 장력이다.


영화는 인물의 이야기를 ‘전개’하는 대신, 전개가 성립되지 않는 상태를 반복적으로 드러낸다. 병치된 사건들은 인과적으로 이어지기보다 서로를 비껴간다. 그 결과 이 작품은 하나의 이야기라기보다, 이야기가 성립하지 않는 방식 자체를 보여주는 장치에 가까워진다. 영화는 끊임없이 또 다른 이야기들이 틈입하는 것을 허용하며 ‘완성된(고정된)’ 한 편의 작품이 되는 것에 틈을 벌린다. 


영화 <주희에게> 스틸컷 이미지6


그러나 <주희에게>에서 “영화가 되지 못한 것들”은 단순히 미완성의 흔적이 아니다. 그것은 애초에 영화라는 형식이 전제하는 통합, 인과, 중심성의 구조가 더 이상 안정적으로 유지되지 않는 조건을 가리킨다. 성필의 실패, 철규의 실패, 그리고 주희의 비고정성은 각각 독립된 사례가 아니라, 동일한 균열을 서로 다른 방식으로 드러내는 증상들이다. 이때 실패는 결과가 아니라, 형식이 더 이상 자신을 완성하지 못하는 상태 자체로 이해되어야 한다. 


<주희에게>가 드러내는 것은 인물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이야기 자체가 더 이상 안정적으로 조직될 수 없는 지점이다. 서로 다른 실패들이 겹쳐진 채로 정리되지 않은 복수의 흔적으로 남아 있는 상태에서, 스스로를 하나의 완결된 서사로 수렴시키지 못한 채 이야기를 지속한다. 즉, 실패들이 서로를 가로지르며 하나의 형식 자체를 붕괴시키는 과정을 통해, 끊임없이 영화를 현재진행형의 상태로 유지시키는 근본적인 동력을 형성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