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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지애 (2024 영화의전당 영화평론대상 수상자)

<새벽의 Tango> : 불가능한 동시성을 견디는 스텝
영화 <새벽의 Tango> 스틸컷 이미지



<새벽의 Tango> : 불가능한 동시성을 견디는 스텝


장지애 2024 영화의전당 영화평론대상 수상자


영화는 ‘말’을 끝내 신뢰하지 않는다. 인물들은 자신의 상처를 장황하게 진술하지 않는다. 감정은 설명되기보다 누락되고, 중요한 순간마다 대화는 중간에서 끊어진다. 일반적인 관계 영화에서 대사는 오해를 해소하고 인물들을 서로에게 도달하게 만드는 매개로 기능한다. 그러나 <새벽의 Tango>에서 언어는 자꾸만 제 기능을 상실한다. 누군가는 해야 할 말을 끝내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하고, 누군가는 상대의 침묵 앞에서 성급히 등을 돌린다. 그 결과 영화 속 관계는 ‘이해’ 위에서 구축되지 않는다. 오히려 이해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상대의 곁에 잠시 머물러보려는 미완의 태도 위에서 간신히 지속된다. 어쩌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관계란 바로 이런 것인지도 모른다. 완전한 소통이 아니라, 영원히 번역되지 않을 타인의 침묵을 견디는 일.


영화 <새벽의 Tango>가 응시하는 것은 두 몸의 완벽한 밀착이 선사하는 황홀경이 아니다. 오히려 이 영화는 탱고라는 형식을 빌려, 타인이라는 결코 정복할 수 없는 영토를 마주했을 때 인간이 느끼는 근원적인 무력감과 그 무력감을 견뎌내는 ‘태도’에 대해 이야기한다. 흔히 탱고를 친밀성의 은유로 읽곤 하지만, 이 영화에서 탱고는 도리어 그 친밀성이 얼마나 자주, 그리고 필연적으로 실패하는지를 폭로하는 장치에 가깝다. 


영화 <새벽의 Tango> 스틸컷 이미지2


우리는 흔히 누군가를 사랑하거나 이해한다는 것을 상대와 내가 하나의 리듬으로 동기화되는 상태라고 믿는다. 그러나 탱고의 진실은 ‘하나 됨’이 아니라 ‘따로 있음’의 감각을 유지하며 서로의 무게를 지탱하는 데 있다. 상대의 다음 스텝은 결코 내 통제하에 있지 않다. 파트너가 발을 내디딜 때, 그 움직임이 내 예측을 배반할 수 있다는 사실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 즉 통제 불가능성을 견디는 것이 탱고의 본질이다. 영화 속 인물들이 반복적으로 경험하는 감각도 바로 이것이다. 누군가 용기를 내어 한발 다가갈 때 상대는 약속이라도 한 듯 뒤로 물러난다. 결정적인 순간마다 박자는 어긋나고 시선은 빗나간다. 한 공간에 머물면서도 저마다의 시간 속에 고립된 채 살아가는 인물들 사이로, 결코 좁혀지지 않는 심연 같은 불협화음이 흐른다. 


이처럼 인물들은 끊임없이 엇박자로 존재한다. 누군가는 이미 지나간 감정 속에 머물러 있고, 다른 누군가는 아직 도착하지 않은 미래의 가능성을 바라본다. 따라서 영화의 관계는 언제나 시간차 속에서만 성립한다. 이를테면 지원은 상대의 호의에 즉각적으로 반응하지 못한다. 감정은 항상 늦게 도착한다. 반대로 주희는 관계를 지속하기 위해 끊임없이 먼저 움직이지만, 그 선행하는 몸짓은 종종 공허 속으로 미끄러진다. 영화는 바로 이 비동시성의 감각을 반복적으로 조직한다. 대화는 제때 이어지지 않고, 시선은 어긋나며, 함께 걷는 장면에서조차 두 사람의 속도는 미세하게 불일치한다. 중요한 것은 영화가 이러한 어긋남을 극복되어야 할 장애로 취급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히려 <새벽의 Tango>는 관계란 본질적으로 리듬의 실패 위에서만 가능하다고 말하는 듯하다.


영화 <새벽의 Tango> 스틸컷 이미지3


영화는 이러한 리듬의 문제를 단지 관계의 차원에 머물게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영화 전체는 하나의 불안정한 시간 감각 위에 구축되어 있다. 제목이 지시하듯 ‘새벽’은 이 작품의 핵심적인 시간성이다. 그러나 여기서 새벽은 감상적 정조를 위한 배경이 아니다. 그것은 어떤 시간에도 완전히 귀속되지 못하는 상태 자체를 의미한다. 밤은 끝났지만 아침은 아직 도래하지 않았다. 노동은 종료되었으나 피로는 몸에 남아 있고, 하루는 시작되었으나 삶은 여전히 정지된 것처럼 보인다. 인물들이 처한 상태 역시 그러하다. 그들은 과거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으며, 미래를 향해 나아갈 수도 없다. 따라서 영화의 새벽은 단순한 경계의 시간이 아니라, 시간의 흐름 자체로부터 이탈된 상태에 가깝다.


영화 <새벽의 Tango> 스틸컷 이미지4


그것은 영화의 공간 구성과도 긴밀히 연결된다. 공장, 숙소, 편의점, 새벽의 텅 빈 거리. 인물들이 머무는 장소들은 하나같이 임시적이고 기능적이다. 누구도 그곳에 뿌리내리지 못하고 잠시 머물다 스쳐 지나갈 뿐이다. 특히 공장에 대한 묘사는 흥미롭다. 흔히 노동 영화가 공장을 자본의 착취나 신체적 고통의 장소로 호명한다면, 이 영화에서의 공장은 ‘감각이 증발하는 장소’로 그려진다. 컨베이어 벨트가 내뿜는 단조로운 소음과 기계적인 반복 노동 속에서 인물들의 감정은 서서히 마모되어 형체를 잃는다. 


영화 <새벽의 Tango> 스틸컷 이미지5


주인공 지원의 표정이 그토록 건조한 이유는 그녀가 냉혹해서라기보다, 수많은 상처를 통과해온 인간이 자신을 지키기 위해 선택한 최후의 방어기제, 즉 ‘감각의 소거’에 가깝다. 영화는 이 무감각의 상태를 단순한 사회적 병리 현상으로 치부하지 않는다. 오히려 타인과 관계를 맺기 위해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상처로부터 자신을 격리하려는 인간의 본능적인 몸짓으로 그려낸다. 무표정이라는 가면 뒤에 숨어 감각을 지워버린 지원에게 탱고라는 생생한 신체의 접촉이 끼어드는 순간, 영화는 오래 봉인되어 있던 감각의 표면이 타인의 리듬에 의해 다시 흔들리기 시작하는 과정을 섬세하게 가시화한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영화의 결말을 두고 ‘희망’이나 ‘치유’ 같은 낙관적인 단어를 꺼내는 것은 적절치 않다. 영화는 어떤 결정적인 화해의 장면도, 상처가 씻은 듯 낫는 기적도 보여주지 않는다. 대신 영화가 남기는 것은 훨씬 더 미약하고 위태로운 무언가다. 그것은 서로 다른 리듬을 가진 존재들이, 결코 완전히 맞춰질 수 없다는 절망적인 사실을 알면서도 다시 한번 같은 박자를 시도해 보는 구차하고도 숭고한 움직임이다. 중요한 것은 이 춤이 성공적으로 완성되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실패할 것이 자명함에도 불구하고, 다시 한번 상대의 발 근처로 자신의 발을 내딛는 그 ‘의지’ 자체를 영화는 묵묵히 응시한다.


영화 <새벽의 Tango> 스틸컷 이미지6


<새벽의 Tango>는 관계에 대한 영화라기보다, ‘타인과 함께 시간을 살아내는 일이 얼마나 고단하고 불가능에 가까운 과업인가’를 증명하는 보고서다. 사랑은 뜨거운 감정의 소용돌이가 아니라 건조하고 피로한 리듬의 조율이며, 타인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정체성을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끝내 이해할 수 없는 그 사람만의 ‘속도’를 묵묵히 견뎌주는 일이다.

영화는 바로 그 불가능한 동시성 위에서 간신히 지속되는 관계의 위태로운 형태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다. 이때 탱고는 더 이상 화려한 무대 위의 낭만적 유희가 아니다. 그것은 서로의 균형을 무너뜨리지 않기 위해, 발등을 찍히고 스텝이 꼬이면서도 다시 몸을 맞춰보려는 가련한 존재들의 서툰 기술이다. 새벽의 어스름 속에서 두 사람이 나누는 그 위태로운 호흡이야말로 우리가 타인에게 도달할 수 있는 가장 정직한 거리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