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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승호(2025 영화비평 공모 수상자)

무지의 유희, <교생실습>
영화 <교생실습> 스틸컷 이미지



무지의 유희, <교생실습>


장승호(2025 영화비평 공모 수상자)


“비평은 다음과 같은 이념에 의해서만 효력을 갖는다. 즉, 이미지를 만드는 사람들과 이 이미지를 보는 사람들 사이에 편차가 있으며, 이 편차가 소중하다는 것이다. 나아가 영화와 관객이 서로를 정확하게 대면하지 못할 때마다, 영화와 관객 사이에 약간의 글쓰기를 끼워 넣는 것이 의미 있다는 것이다.” - 세르주 다네


세르주 다네의 저 언명에 비추어 봤을 때 김민하의 <교생실습>(2026)은 관객과 정직하게 대면하는 영화다. 이 대면의 거리는 양자가 손을 맞잡을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워, 얼핏 보면 비평이라는 제3자가 들어설 자리가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학교라는 공간에 잠재된 억압과 증오의 정념을 극한까지 끌어올린 <여고괴담>(1998~2021) 시리즈와 학교를 일종의 주술과 저주의 제단으로 탈바꿈시킨 <콧쿠리상>(1997)과 같은 일본의 호러 영화들을 통과해 온 관객이라면, 기존 호러의 문법을 비틀고 희화화하는 김민하의 작법은 크게 낯설지 않을 것이다. 더군다나 <아메바 소녀들과 학교괴담: 개교기념일>(2024, 이하 <아메바 소녀들>)과 <교생실습>은 공포보다는 패러디와 코미디의 색채를 투명하게 전달한다는 점에서 온몸으로 선명히 감각할 수 있는 영화다.


그렇기에 김민하의 학교 괴담 시리즈를 학교에 관한 포스트모던 장르물이나 B급 무비로 규정하고 그 전복적 작법의 도식을 상술하는 통속적인 비평은 큰 의미가 없을 듯싶다. 그 대신 떠오르는 호기심의 단서는 김민하의 <교생실습>이 단독 작품이 아니라 시리즈의 속편이라는 것이다. 단순한 패러디를 두 편에 걸쳐 이어내는 것은 그리 합리적이지 않아 보인다. 게다가 어떤 작품을 단독 장편이 아닌 시리즈로 작업하는 일은 필연적으로 어떤 방향을 정초하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그는 이 패러디를 통해서 어느 방향을 향하고 있는 것일까. 그는 어째서 <아메바 소녀들>에서 멈추지 않고 학교 괴담 시리즈를 연작으로 이어가고 있는가. 이것이 본 글이 품고 있는 가장 큰 물음이다.


학교 괴담이란 무엇인가. 레퍼런스를 일일이 달기 어려울 정도로 방대하게 분화된 학교 괴담 장르를 유형화하는 일은 대개의 경우 무용하지만, 부분적 이해를 위해 다소 거칠게 도식화해 본다면 그것은 겉으로는 공포의 외양을 하면서도 그 안으로 들어가면 탐정 소설과 유사한 구조를 띠고 있는 장르다. 학교의 특정 장소에서 귀신 혹은 요괴로 인한 피해자가 발생한다. 주인공은 적극적으로 혹은 수동적으로 그 사건의 전말을 추적하고 조금씩 진실이 밝혀진다. 막바지에 원귀와 대면한 인물은 그 한을 해원하거나 성불이 불가해진 대상을 어쩔 수 없이 처치한다. 혹은 도리어 귀신에게 살해당하거나 살아도 산 것이 아닌 위치에 놓이기도 한다.


이러한 전통적인 학교 괴담의 구조를 되짚어 볼 때 학교는 다른 의미에서 체화된 폭력을 발견하는 배움의 공간이 된다. 학교라는 제도 내부에는 명시적 교육과정 외에도 잠재적 교육과정, 다시 말해 학생들의 몸에 각인되는 어떤 고통의 구조가 있는데 영화가 뒤늦게나마 파괴적 역할을 수행했던 그 잠재적 구조를 밝히는 폭로의 창으로 작동하는 것이다.


그러나 김민하의 학교 괴담 시리즈는 이 지점을 전면적으로 비껴간다. <아메바 소녀들>에서 학교에 자리 잡은 귀신의 근원은 끝내 규명되지 않는다. 그 귀신이 귀신 숨바꼭질을 만들어 낸 이유도 본인의 말을 빌리면 “재미있기” 때문이다. 그나마 <교생실습>에서는 ‘이다이나시(유선호)’라는 요괴에 관한 설정이 등장하지만 그에게서 한과 관련된 서사를 찾아보기는 어렵다. 이다이나시의 유일 목적은 수명을 연장하는 것이지만 죽음을 초극하려는 동기가 될 만한 정동은 배제되어 있다. 결과적으로 두 작품에는 괴담 장르에서 초자연적 존재에게 배정되던 ‘한(恨)’의 서사가 소거되어 있다. 원이 없으므로 소녀들은 진실을 밝힐 필요도 그것을 해소할 필요도 없다. 그렇다면 이 세계에서 소녀들은 대체 귀신 혹은 요괴와 무엇을 해야 하는가. 그것은 다름 아닌 게임이다.


<아메바 소녀들> 속 지연(김도연)과 은별(손주연), 그리고 현정(강신희)과 민주(정하담)는 영화 내내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학교의 지박령과 숨바꼭질을 한다. 숨바꼭질에서 승리하면 수능의 정답을 모두 알 수 있지만, 패배하면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완전히 잊히는 ‘사회적 죽음’에 처해진다. 그럼에도 소녀들은 게임에 참여한다. 여기서 다시 한 가지 의문이 남는다. 수능 만점이 아무리 중대한 성취라 할지라도 사회적 죽음을 담보로 삼을 만큼 절대적인 가치라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이에 관해 영화는 명확한 동인을 부여하는데, 소녀들의 성적이 8등급이라는 현실이 그것이다. 방송연예과와 영화과에 진학하고자 하는 소녀들에게 주어진 유일한 동아줄, 그것은 바로 귀신과의 숨바꼭질이다. 여기서 귀신은 미스터리를 품고 있어 그것을 밝혀내야 하는 존재도 아니고 공동체를 위해 그 위험성을 제거하거나 해원을 도모해야 하는 대상도 아니다. 김민하의 세계에서 귀신이란 두려움을 유발하는 초자연적 타자라기보다는 견고한 현실의 법칙을 우회하게 해주는 일종의 ‘마법사’와 같다. 요컨대 소녀들은 지금 마법사와 판돈을 걸고 승부를 보는 중이다.


영화 <교생실습> 스틸컷 이미지2


이는 <교생실습>에서도 고스란히 반복된다. 성적이 8등급일 뿐만 아니라 기초생활수급자라는 경제적 어려움까지 등에 짊어진 지수(홍예지)와 샛별(이여름), 그리고 민지(이화원)는 이다이나시를 제 발로 찾아간다. 이들은 목숨을 건 시험들을 돌파하고 자신들의 수명이 담긴 영혼을 바쳐 시험의 정답을 얻어낸다. 물론 그 거래는 영혼을 바친 존재가 서른이 되기 전에 사망한다는 페널티가 있는 불평등 조약이지만 말이다.


어찌 되었든 이러한 절차들을 통과하여 <아메바 소녀들> 속 소녀들은 원하는 정답을 쟁취한다. 그런데 여기서 던질 수밖에 없는 질문은 표면적으로 비슷한 구조와 소재를 반복하는 듯 보이는 <교생실습>이 어째서 굳이 만들어져야 했는가 하는 점이다. 아마도 그 유사점 사이에서 작은 차이를 발견할 수 있다면 거기에 해답이 있으리라.


<아메바 소녀들>의 결말이 소녀들의 승리라는 해피 엔딩으로 귀결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쉽게 지나치기 어려운 대목이 하나 있다. 1998년 이후 대략 작중 현재에 이르기까지 귀신 숨바꼭질에서 승리한 소녀가 단 한 명도 없었다는 설정이다. 말하자면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숨바꼭질을 시도했던 소녀들은 모두 살해당했다는 뜻인데, 이런 관점에서 보면 게임에 참전한 소녀들의 행위는 해 볼 만한 도박이라기보다 일종의 자살 행위에 가깝다. 주인공들의 승리 아래 20년간 사망했던 다른 소녀들의 존재가 전제되는 순간, 관객의 심경은 어딘가 모르게 뒤숭숭해진다. 대체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는 기이한 감각. 영화 역시 이를 인지하고 있는지 초반에 이 설정을 단 한 번만 설명한 후 엔딩에 도달할 때까지 사망한 소녀들에 대한 언급을 일절 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매끄러운 은폐는 도리어 어딘가 찝찝한 잔여감을 남긴다. 이십여 년간 죽음에 처한 소녀들은 얼굴도 이름도 장면화되지 않는다. 그들은 어디로 갔는가.


영화 <교생실습> 스틸컷 이미지3


흥미로운 사실은 <교생실습>과 <아메바 소녀들> 간의 가장 결정적 차이가 이 대목에서 발생한다는 점이다. <아메바 소녀들>이 숨바꼭질에서 이긴 후 전리품을 챙기며 그 끝을 맺는다면, <교생실습>은 이미 성공적인 거래를 마치고 좋은 성적을 누리고 있는 소녀들 앞에 교생 은경(한선화)이 난입하는 형국이다. 그는 이다이나시와 소녀들 간의 거래를 무화하고, 더 나아가 이다이나시라는 마법사의 존재 자체를 지워버리기에 이른다. 대체 그는 어째서 이 게임을 방해하는 것일까. 심지어 그는 이 거래가 불공정하다는 사실도 모른 채로 훼방을 놓는다. 그 이유는 간명하다. 은경이 온전히 ‘무지’하기 때문이다. 그는 사태를 면밀히 파악한 후 움직이는 성향의 계획주의자가 아니다. 실습 첫날 스파게티 웨스턴 음악을 등에 업고 학생에게 달려들거나, 문제가 무엇인지도 모른 채 흑마술 동아리 교실에 잠입하는 행동주의자에 가까운 인물이다. 특히 교생이면서도 극중 이다이나시를 만나기 위해 통과해야 하는 국·영·수 관문 중 어떤 관문에서도 힘을 쓰지 못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는 ‘무지’라는 개념이 인격화된 실체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그 무지가 소녀들을 구한다. 


영화 <교생실습> 스틸컷 이미지4


사실 이런 게임의 붕괴는 전작에서 소녀들이 이루었던 승리를 부정하는 일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이 부정을 경유함으로써 전작의 뒤숭숭했던 분위기는 비로소 중화될 수 있다. 소녀들은 더 이상 성적을 올리기 위해 목숨을 판돈 삼는 자살 미션에 뛰어들지 않아도 된다. 성적이 8등급이어도 괜찮다. 삶은 어떻게든 이어지며 때때로 교정에서 비눗방울을 불던 순간처럼 생생한 현재를 즐기면 그뿐이다. 그런 관점에서 <교생실습>은 <아메바 소녀들>의 오탈자를 바로잡는 일종의 ‘개정판’처럼 느껴진다. 장르가 제공하는 순수한 유희와 쾌감은 <아메바 소녀들>의 몫일지 모르지만, 나에게 있어 어쩐지 마음속 깊이 남는 쪽은 <교생실습>의 세계다. 거기에는 계산할 줄 모르는 지독히도 순수한 무지가 있고, 바로 그 눈먼 맹목 속에서 자라나는 애정이 있다. 어쩌면 사랑은 무지한 자들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일지도 모르겠다. 물론, 그리 개연적이지는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