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이동윤 평론가

<디스클로저 데이> - 동부의 무법자
영화 <디스클로저 데이> 포스터 이미지



<디스클로저 데이> - 동부의 무법자 


이동윤 (부산영화평론가협회)


스필버그의 <디스클로저 데이>를 감싸는 SF 스릴러라는 장르적 외피는 이 영화가 은닉하고 있는 본질적인 좌표를 가리기 위한 일종의 알리바이에 가깝다. 이상한 언급으로 출발해보려 한다. 이 영화에서 가장 의미심장한 대사는 영화 중반에 나온다. 기상캐스터 마거릿(에밀리 블런트)이 기괴한 발화의 징후를 겪은 뒤 남자친구를 남겨두고 떠날 때 “동부로 간다”가 그것이인데, 이 대사는 작품의 운동성을 규정한다. 


집을 떠나 서쪽으로 향하는 웨스턴 장르의 궤적이 미국적 팽창 신화와 개척이라는 이데올로기를 구조화하는 물리적 동력이었다면, 끊임없이 동쪽으로 내달린 마거릿이 기어이 당도한 곳이 새로운 세계가 아니라 유년 시절의 낡은 옛집이라는 점은 복기할 만하다. 웨스턴의 좌표가 무언가를 획득하기 위한 서사적 전진이라면, 이스턴(Eastern)을 택한 이 영화의 행로는 이미 쥐고 있던 환상을 기꺼이 폐기하고 기원론적 장소로 퇴각하는 서사의 붕괴 과정을 시각화하는 것에 다름없다. 다시 말해 스필버그는 팽창의 동력이 완전히 소진된 현재의 시간축 위에서, 기존의 미국적 내러티브를 역주행하는 방식으로 구조적인 도돌이표를 그려낸다.


이 역방향의 동선이 종착지에 이르러 마거릿이 옛집 거실에 들어설 때, 영화는 과거 그녀가 외계 존재와 마주했던 시퀀스를 현재의 공간 위로 포개어 낸다. 아이가 불현듯 외계 존재에게 매혹되어 우주선에 탑승하고, 그것이 실험처럼 보이는 이 장면은 이상하리만치 짙은 감흥을 남긴다. 이 조우의 순간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대상을 묘사하는 스필버그의 영화 언어가 과거의 문법과 어떻게 단절되어 있는가 하는 점이다. 카메라는 미지의 존재를 신비화할 때 으레 사용되던 유려한 롱테이크를 멈추고 관찰자적 시선으로 물러서다가도, 불쑥 관찰의 거리를 좁히며 낯선 공간의 무거운 공기음과 어린아이의 노랫소리인 다이제틱 사운드만으로 이 시간을 위태롭게 채운다. 이러한 연출적 결단은 미지의 존재를 형이상학적 판타지로 수렴시키려는 장르적 관습을 거부하고, 그 조우의 순간을 어떠한 수사도 배제된 지표적 기록물로서, 즉 객관적인 물리적 실체로 현전시키려는 감독의 구조적 통제에 가깝다. 음악과 카메라의 운동성을 정제한 이 응시 안에서, UFO와 외계인은 환상이 아니라 꼼짝할 수 없는 실재 현상으로 객석에 도달한다.


영화 <디스클로저 데이> 스틸컷 이미지


이런 매체적 통제의 시도는 기밀 데이터를 쥐고 도주하는 대니얼(조시 오코너)을 둘러싼 대립 구도에서도 또 다른 방식으로 변주된다. 영화는 이 갈등을 세련된 지능전의 양상으로 격상시키지 않는다. 워덱스의 거대한 첨단 디지털망이라는 비물질적 권력 안에서, 인물들의 추격전이 지나치게 투박하고 물리적인 마찰로 환원된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진실을 향한 인류적 인식의 도달이 데이터로 철저히 차단된 세계 속 인물들이 취할 수 있는 유일한 대항 방식이 육체의 직접적인 투신밖에 남지 않았다는 빈곤함을 역설적으로 드러내기 때문이다. 이들이 벌이는 진흙탕의 질주는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한 유효한 수단이라기보다는, 시스템의 폐쇄성 안에서 길을 잃은 자들이 벌이는 맹목적인 동선 낭비이자 무력화된 주체들의 제스처에 가깝다.

 

 이 퇴각과 무력화의 궤적이 결국 닿게 되는 곳은 영화의 후반부, 마침내 기밀 파일이 방송사에 송출되는 이른바 '디스클로저 데이'의 순간이다. 이 클라이맥스에서 스필버그가 선택한 스펙터클은 하늘을 뒤덮는 거대한 우주선의 이미지가 아니다. 카메라는 돌연 시선을 돌려, 각자의 파편화된 시공간 속에 고립되어 있던 전 세계 수십억 명의 인류가 일제히 ‘같은 화면’을 올려다보는 그 정적인 찰나를 몽타주한다. 모든 감각과 시선이 개별적인 모니터 단위로 쪼개진 채 공통의 내러티브가 실종된 시대에, 스크린에서 뿜어져 나오는 동일한 광원이 수많은 눈동자에 비치며 물리적인 동기화를 이뤄내는 이 시퀀스는 다분히 메타 영화적으로 보인다. 이는 단순히 분열된 현대 사회의 공동체적 회복을 촉구하는 낭만적 교훈이라고 보긴 어렵다. 오히려 스필버그는 영화라는 매체가 지닌 가장 원초적인 장치, 즉 어둠 속에서 하나의 빛을 향해 군중의 시선을 강제로 정렬시키는 극장적 환영의 메커니즘을 동원하여 이 뿔뿔이 흩어진 세계를 일시적으로나마 봉합할 수 있는지 실험하는 것에 가깝다.


영화 <디스클로저 데이> 스틸컷 이미지2


그렇기에 마거릿이 선언했던 ‘동쪽’이라는 방향성은 단순히 상실된 과거의 복원이나 연대의 회복이라는 단일한 상징으로 닫히지 않는다. 그것은 무한한 확장을 전제하던 서부극적 신화가 끝난 문명의 종착지일 수도 있고, 외부로 향하던 시선을 내면의 폐허로 돌리는 기원적 귀환일 수도 있으며, 더 이상 거대 서사가 작동하지 않는 세계에서 영화라는 매체가 당도한 어떤 한계점일 수도 있다. 스필버그는 외계 생명체라는 미지의 타자를 끌어들이면서도 이들을 통한 즉각적인 인류의 구원이나 형이상학적 초월을 약속하지 않는다. 수십억 개의 시선을 하나의 프레임으로 묶어낸 그 압도적인 몽타주조차, 스크린의 빛이 꺼지고 나면 다시 흩어질 수밖에 없는 일시적인 착시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모든 서사적 동력이 바닥난 시대에 기어이 역주행을 감행하면서까지 영화의 매체적 권능을 증명해 보려 한 이 장대한 실험은, 어쩌면 노감독 스스로도 확신하지 못하는 질문을 객석에 던져둔 채 미결의 상태로 화면을 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