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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 비평

<충충충> : 세계를 향한 돌진
영화 <충충충> 스틸컷 이미지



<충충충> : 세계를 향한 돌진 


장지애 2024 영화의전당 영화평론대상 수상자


청춘을 우리는 흔히 가능성의 시기로 말한다. 그러나 가능성은 좀처럼 저절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세계와 아무런 마찰도 일으키지 않는 삶은 안정적일 수는 있어도 자신의 목소리를 갖긴 힘들다. 한창록의 <충충충>은 바로 그 마찰을 영화의 첫 번째 원리로 삼는다. 제목이 암시하듯 이 영화를 움직이는 것은 세 번의 ‘충(衝)’이다. 충동은 충돌을 낳고, 충돌은 충격을 남긴다. 그리고 그 충격 속에서 비로소 청춘은 자신이 누구인지 말하기 시작한다. 어쩌면 청춘이란 일정한 시기가 아니라 세계와의 충돌이 남긴 흔적의 다른 이름인지도 모른다.


영화 <충충충> 스틸컷 이미지2


영화 속 세 인물은 저마다 세상을 향해 달려가지만 그들의 발걸음은 번번이 단단한 벽에 가로막힌다. SNS 속에서만 아름다움을 증명받으려는 지숙, 익명의 채팅방에서 하루를 연명하는 덤보, 친구들을 지켜낼 수 있으리라 믿는 용기까지. 그들에게 세계는 품어주는 공간이라기보다 끊임없이 밀어내는 표면에 가깝다. 이들은 패배한 청춘이라기보다 아직 자신이 부딪쳐야 할 세계의 크기를 가늠하지 못한 존재들이다. 


영화가 가장 먼저 거부하는 것은 매끄러운 재현이다. 화면은 처음부터 안정적인 시점을 허락하지 않는다. 어안렌즈는 공간을 부풀리고, 디지털 노이즈는 세계의 표면을 거칠게 긁어낸다. 피사체는 온전한 형태를 유지하지 못하고 프레임은 언제나 조금씩 비틀려 있다. 이것은 현실을 왜곡하기 위한 장식이 아니다. 오히려 이 세계 자체가 이미 균형을 잃었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방식이다.


영화 <충충충> 스틸컷 이미지2


지숙과 덤보 그리고 용기가 살아가는 공간은 대체로 닫혀 있다. 대부분의 관계는 스마트폰 화면을 통과해 이루어진다. 흥미로운 것은 영화가 이 폐쇄성을 공간의 크기가 아니라 렌즈의 성질로 체험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얼굴은 일그러지고, 공간은 깊이를 잃으며, 신체는 마치 유리벽 안에 갇힌 표본처럼 보인다. 이들은 사회로부터 소외된 청춘이라기보다 이미 하나의 관찰 대상이 되어버린 존재들이다. 


따라서 제목의 ‘충(蟲)’이라는 음성적 중첩 역시 우연처럼 들리지 않는다. 이들은 사회의 중심에서 인간으로 호명되지 못한 채 변두리에서 꿈틀거리는 생명들이다. 카메라는 그들을 연민의 대상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오히려 곤충을 확대하듯 지나치게 가까이 들이밀며 피부와 숨결, 떨림을 집요하게 기록한다. 아름다움은 사라지고 물질만 남는다. 청춘은 더 이상 낭만이 아니라 생존의 표면이다.


영화 <충충충> 스틸컷 이미지4


영화의 중반 이후 우주라는 존재가 등장하면서 이 균형은 급격히 흔들린다. 중요한 것은 우주가 악인이라서가 아니다. 그는 이미 완성된 질서의 얼굴이다. 용기와 친구들이 서로의 결핍을 통해 유지해 왔던 작은 세계 안으로 외부의 규칙이 침입하는 순간 영화는 서사를 전개하기보다 형식을 무너뜨리기 시작한다. 


점프컷은 더 이상 시간의 생략이 아니라 관계의 단절을 의미한다. 화면을 가르는 이중 프레임은 서로 다른 감정이 한 공간 안에서 공존하지 못하는 상태를 시각화한다. 네거티브 효과는 현실을 환상으로 바꾸지 않는다. 오히려 지금까지 현실이라고 믿었던 세계가 얼마나 불안정한 감각 위에 세워져 있었는지를 드러낸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편집이 인물의 감정을 설명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감정은 대사를 통해 전달되지 않는다. 화면이 갑자기 끊기고, 리듬이 깨지고, 이미지가 서로 충돌하는 순간 관객은 인물을 이해하는 대신 그 불안정한 호흡을 자신의 몸으로 경험하게 된다. 영화는 공감을 요구하지 않는다. 감각을 전염시킬 뿐이다.


사운드의 사용 역시 같은 원리 위에 놓여 있다. 음악은 장면을 아름답게 감싸지 않는다. 오히려 장면과 부딪치며 계속해서 균열을 만든다. 왜곡된 음향과 거친 비트는 공간을 메우기보다 비워낸다. 어떤 대사는 끝내 명확하게 들리지 않고, 어떤 감정은 소음 속으로 흩어진다. 우리는 인물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지만, 그들이 더 이상 서로에게 도달하지 못한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하게 체험한다.


영화 <충충충> 스틸컷 이미지5


후반부의 파국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읽힌다. 용기의 마지막 선택은 영웅적 결단도, 사회를 향한 선언도 아니다. 그것은 더 이상 자신의 감각을 지탱할 수 없게 된 한 신체의 붕괴다. 영화는 이 장면을 비장하게 연출하지 않는다. 눈물을 위한 음악도 감정을 증폭시키는 클로즈업도 없다. 대신 거칠게 흔들리는 화면과 끝내 안정되지 않는 리듬만이 남는다.


바로 이 지점에서 영화는 청춘영화의 익숙한 문법을 거부한다. 대부분의 성장영화는 상처를 통과한 이후의 회복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충충충>에는 성장도 치유도 없다. 남는 것은 부딪친 흔적뿐이다. 제목이 암시했던 세 번의 충돌은 결국 세계와 세계의 충돌이 아니라 감각과 현실이 끝내 화해하지 못하는 상태를 가리킨다. 


물론 이러한 형식은 때때로 과잉처럼 보이기도 한다. 모든 장면이 최대한의 강도로 밀어붙여지기 때문에 리듬이 단조롭게 느껴지는 순간도 존재한다. 몇몇 장면에서는 이미지보다 형식적 제스처가 앞서는 인상도 남는다. 그러나 이러한 미숙함조차 영화의 에너지와 완전히 분리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아직 길들여지지 않은 감각이 가진 위험성을 드러낸다. 


<충충충>이 흥미로운 이유는 청춘을 사회문제의 사례로 환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영화는 청춘의 절망을 설명하지 않는다. 대신 설명의 바깥에 밀려나 있던 얼굴들, 누구도 오래 들여다보고 싶어 하지 않았던 어둠의 표면을 스크린 위로 끌어올린다. 그것은 폭로라기보다 노출에 가깝다. 영화는 이들이 왜 이렇게 되었는지 차분히 해명하기보다, 이미 그렇게 되어버린 몸과 방, 소리와 표정을 관객 앞에 내놓는다. 그러므로 <충충충>의 의미는 문제적 청춘을 진단하는 데 있지 않다. 그보다 이 영화는 매끄러운 세계가 보이지 않게 밀어둔 불안과 수치, 욕망과 결핍의 형상을 끝내 보이게 만든다. 아무도 알고 싶어 하지 않았던 것들 혹은 알고 있으면서도 보지 않으려 했던 것들이 이 영화 안에서는 더 이상 뒤로 물러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