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영화평론가 비평

세상과 대화하는 몸, <소리 없이 나빌레라>와 <소영의 노력>
영화 <소리없이 나빌레라>, <소영의 노력> 포스터 이미지



세상과 대화하는 몸, <소리 없이 나빌레라>와 <소영의 노력> 


윤필립 (한국영화평론가협회)


그동안 한국영화에서 장애를 다루는 방식은 오랫동안 두 가지 서사 사이를 오갔다. '장애'를 극복해야 할 그 무엇으로 바라보는 극복 서사나 사회적 약자에 대한 연민과 동정을 이끌어내는 감동 서사가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비슷한 시기에 개봉한 <소리 없이 나빌레라>(현진석, 2026)와 <소영의 노력>(오재형, 2026)은 이러한 익숙한 틀을 비껴간다. 이들 두 작품에서는 장애를 극복해야 할 결핍으로 소비하는 대신 장애인 여성의 몸을 하나의 예술적 매체이자 세계를 인식하고 표현하는 독자적인 언어로 제시한다. 따라서 <소리 없이 나빌레라>와 <소영의 노력>은 장애를 재현하는 작품이라기보다는 장애인 여성의 신체성과 수행성을 통해 인간 존재와 예술의 본질을 탐구하는 작품으로 읽을 수 있다.

주디스 버틀러에 따르면, 수행성(performativity)은 정체성이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반복되는 행위 속에서 구성된다. 이 관점에서 볼 때 <소리 없이 나빌레라>와 <소영의 노력> 속 여성들은 장애인 무용수라는 정체성을 수동적으로 수용하지 않는다. 그 둘은 끊임없이 움직이며, 춤추고 연습하면서 자신의 몸을 새롭게 구성한다. 즉, 장애는 그들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본질이 아니라 수행을 통해 끊임없이 재구성되는 하나의 조건인 것이다.


영화 <소리없이 나빌레라> 스틸컷 이미지

영화 <소리 없이 나빌레라> 스틸컷


<소리 없이 나빌레라>는 청각장애 여성의 감각 세계를 스크린의 양식으로 각색한다. 이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미학은 청각의 시각화인데, 일반적으로 영화는 소리를 들려주는 예술이지만 이 영화는 오히려 소리를 몸짓과 시선, 호흡, 춤으로 보여지게 한다. 이를 통해 관객은 음악을 귀로 듣기보다 몸의 진동과 움직임을 통해 경험하며, 춤은 음악에 반응하는 결과가 아닌 몸이 스스로 생성하는 언어로 재탄생한다. 더 나아가, <소리 없이 나빌레라>는 청각장애인의 청각을 단순히 '들을 수 없음'으로 설명하지 않고, 진동과 공간감, 신체 감각으로 객관화함으로써 비장애인의 감각 체계를 전복한다. 다시 말해, 이 작품은 청각장애인의 감각 경험을 영화적 형식으로 각색함으로써 비장애인 관객에게 새로운 청각 경험을 제공한다. 이렇게 볼 때 이 작품은 장애를 설명하는 영화가 아니라 감각 자체를 재구성하는 영화라고 할 수 있겠다.


영화 <소영의 노력> 스틸컷 이미지

영화 <소영의 노력> 스틸컷


반면, <소영의 노력>에서 여성 무용수의 몸은 의료적 시선이나 복지 담론이 규정하는 장애인의 몸이 아니며, 오히려 그의 몸은 춤을 만들어내는 창조의 공간으로 기능한다. 영화는 뇌성마비라는 의학적 사실보다 반복되는 연습과 움직임을 집요하게 기록함으로써 관객이 몸의 한계를 확인하기보다 몸이 어떻게 새로운 가능성을 만들어내는지를 목격하도록 한다. 여기서 노력은 성공을 위한 의지가 아니라 존재를 지속하고 확장하려는 근원적 생명의 힘으로 읽힌다. 말하자면, <소영의 노력>은 기대 이상으로 춤을 잘 추는 누군가의 이야기가 아니라 몸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인간'의 이야기인 것이다.


영화 <소리 없이 나빌레라>, <소영의 노력> 스틸컷 이미지

영화 <소리 없이 나빌레라>, <소영의 노력> 스틸컷


그런데 이 두 작품은 모두 여성의 몸을 응시함에도 그 시선은 여성의 신체를 객관적 상관물로 대상화하던 기존의 영화화 방식과 거리가 멀다. 각 작품 안에서 카메라는 장애를 소비하지 않고 몸의 리듬과 호흡을 존중하는데, 이는 다큐멘터리 윤리의 측면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더 나아가, 두 작품 속 카메라는 두 장애인 여성 무용수의 결핍을 확대하기보다는 그들이 살아내는 삶의 리듬을 따라가는 데 포커스를 맞춘다. 그러한 방식으로 관객은 영화 속의 '장애인'을 보기보다 '예술가'를 만나게 된다. 이 지점에서 <소리 없이 나빌레라>와 <소영의 노력>은 장애 재현의 윤리를 새롭게 제시한 작품이라 할 만하다.

한편, 두 작품 속에서 몸은 단순한 생물학적 신체가 아니라 사회와 관계 맺는 살아 있는 몸이다. 메를로퐁티에 따르면, 몸은 세계를 인식하는 주체이자 세계와 만나는 방식이다. <소영의 노력> 속의 몸은 춤을 통해 세계와 관계를 맺고, <소리 없이 나빌레라>의 몸은 표정과 동작 등 신체의 움직임을 통해 세계와 대화한다. 그 결과, 두 작품 속에서 장애인 무용수의 몸은 더 이상 결핍의 표지가 아니라 세계를 생성하는 주체가 된다. 이러한 시도로 장애인 여성의 수행성이 예술 수행의 차원으로 확장될 수 있었다. 두 작품 속에서는 무대 위의 춤뿐만 아니라 일상의 반복적인 연습과 움직임 자체가 하나의 수행이 되고 있다.


영화 <소영의 노력> 스틸컷 이미지

영화 <소영의 노력> 스틸컷


이 두 작품이 특별해지는 또 다른 지점으로 감각의 위계 해체를 들 수 있겠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듣고 이해한 뒤 움직인다고 생각하는데, 영화는 오히려 보고 느끼고 몸으로 듣는 경험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소영의 노력>에서는 존재가 몸을 통해 예술이 되고, <소리 없이 나빌레라>에서는 소리가 몸을 통해 시각화된다. 하나는 존재의 수행을, 다른 하나는 감각의 수행을 드러내지만 두 작품은 모두 몸이야말로 인간 존재의 가장 근원적인 언어임을 증명한다.


영화 <소리 없이 나빌레라> 스틸컷 이미지

영화 <소리 없이 나빌레라> 스틸컷


이와 같이 <소리 없이 나빌레라>와 <소영의 노력>은 장애를 극복의 대상으로 제시하는 대신 장애인 여성의 몸을 예술적 창조와 감각적 인식의 중심에 놓음으로써 장애를 새로운 미학의 가능성으로 전환하고 있다. 그러한 점에서 이 두 작품이 던지는 질문은 하나로 수렴된다. 인간은 무엇으로 존재를 증명하는가? 그리고 두 작품이 제시하는 해답은 명백하다. 인간은 완전한 몸이 아니라 끊임없이 세계와 관계 맺고 자신을 표현하는 몸을 통해 존재한다는 그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