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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 비평

파편이 사랑될 때, <사랑의 네 가지 온도>
영화 <사랑의 네 가지 온도> 포스터 이미지



파편이 사랑될 때, <사랑의 네 가지 온도>


장승호(2025 영화비평 공모 수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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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 영화에는 항상 시간이라는 제약이 뒤따른다. 영화는 1시간 30분이 넘어서는 안 된다는 하스미 시게히코의 주장을 굳이 떠올리지 않더라도, 극장에서 상영되는 장편 영화가 4시간을 넘는 일은 상상하기 어렵다. 기술적 한계에서 시작되어 암묵적으로 굳어진 영화의 이 애매한 조건하에서 대개의 영화는 전통적인 3막 구조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형편이다. 설령 그것에 대항한다고 할지라도 결국 장편은 장면과 시퀀스의 연결로 이루어진다. 그것에 충돌이라는 이름을 붙이더라도 크게 달라질 것은 없다. 파괴든 충돌이든 무언가 덧붙여지는 순간 영상은 길어지기 마련이고 길어진 것은 필연적으로 내러티브에 종속된다.


사랑에 관한 영화도 마찬가지다. <만약에 우리>(2025)와 같은 영화는 사랑의 끝과 시작, 그리고 그 과정을 매끈히 따라가며 어떤 보편적 사랑의 구조를 제안하고 관객은 그에 공명한다. 거기에는 사랑을 했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는 어떤 공통감이 가을녘 바닷가의 윤슬처럼 반짝이고 관객은 그 흐름을 향해 부드러이 침몰한다. 오고 가며 내 안에 출렁임을 남기는 기성의 사랑 이야기를 반복하여 보는 일은 어떤 점에서는 시작과 끝이 똑같은 비극을 꾸준히 관람하던 그리스인들의 심정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야기와 함께 끝을 향하며 내 안의 울렁거리는 정동의 뭉치를 정화하기. 그리고 이 거대하고도 숭고한 사랑 이야기라는 구조 안에 자신을 던져 넣어 그 안에 흡수됨으로써 더 거대한 것의 일부가 되는 안락을 누리기.


그러나 우리의 집단 합일을 향한 욕망을 자극하는 이런 사랑 이야기들은 결국 무언가를 배제할 수밖에 없다. 말하자면 이미지에 의해 이야기가 쓰이므로 이미지가 이야기에 종속된다는 것이다. 직조된 이야기는 이미지의 순수성을 훼손한다. 이미지가 시작과 끝이 있는 사랑 이야기를 실어 나르는 종복이 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잘 알려져 있듯 장편 안에서 작은 결절과 차이를 발견하려는 에릭 로메르나 홍상수의 시도들은 특별하다. 하지만 그 작업들은 어디까지나 장편이기에 장면 혹은 이미지에서 머물지 않고 기어코 이야기에 도착하고 만다. 그러므로 이야기에 종속되지 않는 사랑의 문형 혹은 형태소에 해당하는 이미지를 세계로부터 끄집어내기 위해서는 예술은 그 형식부터 파편이어야 한다. 말하자면 몇몇 단편의 모음. 그렇게 서사에 이끌리지 않고 이미지만으로 스크린을 점유하는 일. 그것은 단편의 역할이자 의무이며, 권능이다.


영화 <사랑의 네 가지 온도> 스틸컷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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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이이레)가 화장을 고친다. 그러다 인기척이 들려오자 황급히 자리를 정돈한다. 곧이어 남자(홍유선)가 히비스커스 차를 가져온다. 붉게 칠해진 여자의 입술과 천천히 달아오르듯 투명한 물컵 내부를 헤집는 히비스커스의 빨강이 노골적으로 얽혀든다. 남자는 여자에게 순회 상영 일정을 검토해달라고 하지만 그녀는 그를 건너편 자리로 밀어낸다. 간단한 피드백을 마친 후 남자가 다시 멀어져 창가에 머물 때 여자는 컵을 슬쩍 밀어 그를 향해 정렬한다. 그러고는 조준을 마친 컵을 들어 올려 차를, 아니 그를 마신다. 여기에는 관계를 진전하는 어떤 행위도 없다. 시간이 흘러 그 관계가 어떻게 되는지 알 수 없으며, 그 전사 또한 블랙박스다. 중요한 것은 나를 눈치채지 못할 애매한 거리에 상대를 밀어 놓는 것, 그리고 그 모호한 긴장의 에로티시즘을 즐기며 연습 삼아 은근히 상대를 마셔 보는 일이다. 이를 위해 상대가 나의 근처에 도착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고 멀리 떠나가서도 안 된다. 그는 떨어져 있으면서도 가까워야 한다. 그의 사각 안에서 들킬 수도 있지만 들키지 않을 방식으로 나는 그를 은밀히 탐한다. <히비스커스>는 그 짧은 순간의 반복된 유희를 포착한다.


영화 <사랑의 네 가지 온도> 스틸컷 이미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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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모든 이가 그런 관계의 긴장감을 즐길 수 있는 건 아니다. 남자는 침범한다. 연극에서 맡은 배역을 연습 중인 수영(김보라미)과 그를 찍는 우석(신문수)의 카메라 사이로. 동아리 부원들과 함께 방문한 오륙도에서도 준호(이규병)는 침범한다. 우석이 섬의 풍경을 촬영할 때 그 앞을 가로막고, 수영의 프로필 사진 촬영을 도울 때에도 원경에서부터 다가와 카메라와 피사체를 잇는 선을 밟아버린다. 곧이어 준호는 수영의 갤러리 안까지 침입한다. 오륙도에서 찍은 사진을 함께 보던 중 우석을 찍은 사진을 발견하고는 임의로 삭제해 버린 것이다. 수영이 화를 내 그를 밀어내지만 준호는 집 근처에서 기다리다 귀가하는 그녀에게 일방적으로 꽃을 건네주고는 사과를 하고 떠난다. 그 사과의 행위조차 침투적이다. 영화는 시종일관 자신의 질투를 이기지 못하고 침범하는 남자를 담는다. 여기서 그것의 올바름이나 건강함 따위는 그리 중요치 않은 듯하다. 과거와 미래 없이 현재뿐인 침범의 시간에서 준호는 고장 난 레코드판처럼 같은 행동을 반복하는 침범-기계다. 준호는 그 침범이 타인을 질색하게 하며 떠나가게 할 것임을 안다. 그러나 그럼에도 침범을 멈출 수 없다. 나는 나를 참을 수 없고 대상은 떠나간다. 그렇게 <우리 계절은 흘러가고>.


영화 <사랑의 네 가지 온도> 스틸컷 이미지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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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때로 어떤 침범은 파괴하지 않고 빈 곳에 무언가를 심어 넣는다. 아주 멀찍이 떨어져 서로가 서로에게 가진 인식조차 가물해지는 관계. 그런 망각의 안개를 헤치고 들어오는 타자의 침범. 오랜만에 만난 윤영(박가영)에게 “쎄하다”거나 “불편하다”는 등 무례해 보이는 언사를 비치던 효리(김해나)는 술자리가 끝난 후 갑자기 친해지고 싶다는 말과 함께 윤영의 집을 방문한다. 가감 없는 솔직함과 너그러운 성정이 결합되어 성사된 2차 자리. 마사지 도구를 두고 이런저런 자세를 취하며 그 사용법을 따지는 일과 회사 워크숍에서 춰야 하는 안무를 함께 춰 보는 장면은 어쩐지 모르게 사랑스럽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각각 인물들이 갖고 있었지만 꺼내 놓을 자리가 없었던 사랑스러움이 그제야 새어 나온다. 잠깐이지만 어슷한 만남에 의해 몸과 마음이 이완되어 이것저것 횡설수설하는 순간. 그 중언부언이 마음의 장막을 녹이고 기억에 점 하나를 남기는 시간. 효리와 윤영 둘을 한 숏에 담을 수 있는 은근한 거리에서 그 잠깐의 일렁임을 포착하는 카메라와 함께 있으면 장엄한 사랑이 없는 삶도 그럴싸하지 않을까, 하는 미소가 뒤따른다. 다음 날 퇴근하고 식사를 하던 중 윤영이 피식하고 웃음을 지었던 것처럼. 어떤 타자의 침범은 때때로 환대할 만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아니 어쩌면 우리는 그것을 빌미 삼아 정해진 안무가 아닌 흘러나오는 춤을 출 그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는지도. 그렇다면 <사람들은 춤춘다>는 단정적 명제는 썩 만족스럽다. 좀 더 보태어 보자면 사람들은 춤춰야 한다.


영화 <사랑의 네 가지 온도> 스틸컷 이미지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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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의 단편들이 모두 어떤 대상을 갖고 있다면 <Road to>에는 물리적 대상이 없다. 대상 없이 어떤 흔적만 편린처럼 기웃거리는 상황. 남자(유홍선)는 어떻게든 그 사랑의 잔열을 보존하고 꺼져 가는 불씨를 살려내야 한다. 이때 주체에게 주어지는 선택지는 보통 둘 중 하나다. 타자를 찾아가거나, 타자를 찾을 수 없을 때는 그의 이미지를 다시 발굴하거나. 결국 그 장소가 어디든 어디론가 돌아가야 하는 것이다. 슬럼프, 권태, 무력, 우울, 어떤 것으로도 설명할 수 있지만 동시에 그 어떤 것으로도 정확히 지시될 수 없는 어정쩡한 감각. 불현듯 머릿속에 그녀(이이레)가 피어오르지만 망각의 기운이 그 잔상을 금세 다 씻어버리고 마는 상태. 인간에게는 이미지가 필요하다. 남자는 그녀와 자신의 이미지를 (재)발굴하는 길을 떠난다. 흥미로운 점은 <Road to>는 그 이미지들이 명백히 섬을 향하고 있음에도 정작 그 제목이 어떤 목적지를 가리키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어지는 몇몇 장면들을 살펴보자. 남자가 섬에 도착하고 만난 항구 가에 뉘어 있는 풍선, 지금은 비어 있는 집들의 담벼락이 그녀의 이미지들을 하나둘 지금 여기로 불러온다. 폐교 복도를 지나던 중 남자는 갑자기 멈춰 서 창밖을 응시한다. 어떤 정념에 휩싸인 순간, 영화는 여태까지 그랬던 것처럼 컬러로 채색된 그녀의 이미지를 덧붙이지 않는다. 외려 카메라는 뭔가를 애틋하게 살피는 남자의 얼굴을 창 너머로 충분한 시간을 들여 응시하고, 화면은 생생한 컬러로 빛난다. ‘너’를 찾으러 왔으나 그 길은 어느새 ‘나’를 찾는 길이 되어 간다. 카메라는 도착점을 찍을 수 없고 무언가를 되찾으려는 정향(定向)만을 포착할 뿐이지만 괜찮다. 우리의 삶은 종착지가 아닌 교량이므로. 그러니 영화의 제목은 역시 <Road to>여야 하겠다. 영화의 끝자락, 해안가 갯바위에 도착한 남자는 어떤 메시지가 담긴 표류병을 띄운다. 제의의 끝자락인 셈. 이미지가 흐릿해지는 언젠가 남자는 다시 돌아올 것이다. 그는 향해 있는 길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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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편의 단편을 경유하며 <사랑의 네 가지 온도>라는 단편집의 제목을 다시 한번 떠올린다. 각각의 작품들이 장면화하는 사랑의 단면들은 온도가 모두 제각각이지만 일반적인 장편에서 그리 비중 있게 다루어지지 않는 순간이라는 점에서는 공통점을 갖는다. 가령 <히비스커스>가 일반적인 장편 안으로 들어간다면 여자가 남자에게 호감을 갖고 있다는 설정 신으로 기능할 것이다. 관객들은 저 은근한 긴장의 즐거움을 함께하는 게 아니라 여자가 남자에게 마음을 품고 있다는 정보를 낚아채고는 제 갈 길을 가리라. 그러나 한 편의 단편으로 영화가 끝남으로써 저 작은 찰나가 곧 사랑의 전부가 된다. 관계 안의 은근한 긴장, 질투심을 이기지 못하는 어리숙한 침범, 권태롭고 무료한 일상 안으로 파고들어 오는 타인과의 잠깐의 교류, 그리고 흩어지는 잔열을 살리기 위해 기억의 유적을 방황하는 일. 전체적인 플롯 안에서는 하나의 부분이자 기능을 담당하여 제 힘을 잃어버릴 이 장면들이 말 그대로 장면을 넘어 영화 전체가 될 때, 우리는 그것을 서사를 위한 정보가 아닌 사랑의 형태소로 바라볼 수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