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평론가 비평
| 질식할 것 같은 삶의 탁류에 카메라를 담글 때, <수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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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질식할 것 같은 삶의 탁류에 카메라를 담글 때, <수련> 장승호(2025 영화비평 공모 수상자) 무참함. <수련>(2026)을 보는 내내 가슴팍 어딘가를 꾹꾹 눌러대던 이 정념에 무참함 외에 다른 이름을 붙이기 어려울 것 같다. 최근 들어 한국 영화 중 이토록 깊은 참담함을 느끼게 만든 영화가 있었던가. 그런 되뇜 중 나의 머릿속을 스친 문장이 하나 있다. 시네필들이 한국 독립 영화를 외면하고 있다는 세간의 어떤 ‘말’. 국내에 배급되는 영화들의 흥행 성적을 살펴보면 특이점이 하나 있다. 해외의 예술·독립 영화는 그 비주류적 성격에도 불구하고 종종 생각 외의 흥행을 보이는 반면, 국내 독립 영화의 상황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이는 흔히 “시네필들에게 국내 독립 영화가 외면받고 있다”는 표현으로 언급되며 제작 지원에 얽혀 있는 독립 영화들의 비독립적 현실에 관한 문제 제기로 이어지곤 한다. 그러나 요인은 그뿐만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나는 여러 가능성 중 하나로 무참함에 관한 반사적 회피를 떠올린다. 물론 해외에서 수입되는 각종 영화에도 각각의 무참함이 있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2024)와 <시라트>(2026), 그리고 <서브스턴스>(2024)는 보는 이가 작품이 유발하는 심적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영화임에도 꽤나 좋은 성적표를 손에 쥐었다. 그 외에 현재 누적 관객 수 7만 명을 돌파한 <어떻게 해야 했을까>(2026)를 들 수도 있을 것이다. 지금의 관객들은 삶의 무참과 비참을 뒤섞어 인간을 저 끝까지 밀어버리는 영화에도 응답하고 있다.
영화 <부모바보>(2025) 포스터 이미지 그러는 와중 <부모바보>(2025) 속 한 장면이 떠오른다. 자신의 방에서 영진(안은수)과 대화를 나누던 진현(윤혁진)의 말. “어떤 영화는 너무 사실적이어서 소름 끼치도록 무섭”다는 것. 그 말은 곧 그래서 “너무 좋았다”는 결론으로 이어진다. 그런데 조금 달리 보면 “너무 사실적이어서 소름 끼치도록 무서운” 것은 동시에 우리를 극장 밖으로 밀어낼 수도 있는 것 아닐까. 다시 말해, 이야기가 현실을 넘어 실재가 될 때 그것은 트라우마적인 것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케케묵은 의문인 것이다. 최근 관객들에게 주목받은 국내 독립 영화 중에서는 어쩐지 무참함을 뿜어내는 작품을 찾기 어렵다. 비교적 주목을 받은 <세계의 주인>(2025)과 <사람과 고기>(2025)는 영화 속 잠재한 소재가 폭발하는 것을 막으려는 것처럼 어딘가 모르게 쿠션 같은 완충재를 심어두고 있는 듯하다. 그러니까 이 영화들은 모두 위험한데, 그럼에도 안전하다. 독립 영화의 가뭄 속에서도 관객 수로 증명되는 지지는 이런 시도가 유효함을 입증하는 듯하다. 한 가지 의문은 국내 흥행에 성공한 <존 오브 인터레스트>와 <서브스턴스>, 그리고 <시라트>와 같은 영화들도 무참함을 유발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영화들 또한 위험하지만, 이 영화들은 다른 의미에서 안전하다. 그것들은 무참함과 함께 이국적인 감각을 생산한다. 그러니까 우리가 스크린에서 맞이하는 타자들은 우리와 역사적으로, 지리적으로, 그리고 정치적으로도 분리되어 있다. 하나의 인간 존재라면 먼 나라에서 벌어졌거나 벌어지는 일에 고통을 느끼지 않을 수 없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스크린을 통해 반사되는 인영이며 우리는 그것을 나의 바로 옆 타인의 것처럼 실감하지 못한다. 스크린에 반사되는 몇 가닥의 빛들은 안타깝게도 관객을 죽이지 못한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 삶에 인접한 것이라면 상황이 달라진다. 고백하건대 나는 <세계의 주인>을 보러 극장에 가기 전, 세 번가량 망설였다. 봐야 한다는 감각과 보고 싶지 않다는 저항이 뒤섞인 얼마간의 갈등. 더욱이 당황스러웠던 것은 극 내내 주인(서수빈)을 보호하려는 것처럼 보였던 카메라의 시선과 엔딩 크레딧을 빼곡하게 채운 자문인의 목록이었다. 머뭇거림은 나만의 몫이 아니었던 것이다. 제작 과정에 관한 인터뷰를 살펴보면 윤가은 감독 또한 수많은 머뭇거림을 통과했음을 알 수 있다. 무참의 세계 앞에서 주저하는 일은 결국 창작자와 관객, 그리고 비평가가 모두 다른 방식으로 공유할 수밖에 없는 하나의 사태인 것 아닐까. 현실 내부에 영화적 형식을 기입하는 일이 야기할지 모르는 진실의 왜곡 가능성, 지근거리에 생존해 있을 대상의 내밀한 고통을 목격하는 일에 대한 책무감,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을 외면하고 싶은 회피 본능 앞에서 우리는 복잡한 심경이 되어 우물쭈물 극장에 들어선다. 리얼리티를 표방하는 국내의 독립 영화 중 우리를 만나기 위해 극장에 찾아온 영화들은 이런 태생적 조건을 꼬리표로 달고 있다. 그런 점에서 <세계의 주인>의 흥행과 성취는 영화의 형식이 된 머뭇거림의 시선으로 완성된다. 만약 감독이 머뭇거리지 않고 <수련> 속 연출가(유준식)의 말처럼 좀 더 뻗어나갔다면 영화가 이렇게 사랑받을 수 있었을까. 관객들이, 아니 적어도 그중 하나인 나 스스로 그것을 견딜 수 있었을까. 지척에 있는 타자의 고통을 목격하고 나의 뒤를 끈질기게 따라붙는 유령을 불러내는 그 일을. 결국 이런 유의 영화들이 비교적 성공할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이 위험하지만 우리의 사적 영역을 붕괴시키지는 않을 정도로 멀리 있기 때문이다. 스크린의 빛은 우리를 비출 수 있지만 우리를 죽일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그 빛을 쐰다.
반면 <수련>은 이런 우회로를 찾지 않고 생의 무참을 있는 그대로 관객에게 투척한다. 모종의 이유로 부모를 피해 상경한 효원(이홍연)과 은서(최은서), 그리고 조금 먼저 서울에 도착해 육체노동을 하며 지내는 인철(박인철)이 만난다. 이들에게 서울은 말 그대로 황무지다. 동시대 서울이 장면화되고 있음에도 그곳은 어쩐지 피터 보그다노비치의 <마지막 영화관>(1971) 속 텍사스의 황량함을 떠올리게 만든다. 더욱 문제인 것은 이 셋에게 부모 역할을 하는 이가 없다는 사실이다. 정황상 효원과 인철이 성인임을 추정할 수 있지만 극 중 자신의 나이를 직접 발화하는 건 아르바이트 면접 중 “열일곱”이라는 단어를 뱉는 은서뿐이다. 보호자도, 마땅한 일자리도, 소속된 학교도 없이 타지에 던져진 아이들의 삶은 한 걸음만 삐끗하면 미끄러져 익사할 위험이 도사리는 연꽃의 가장자리다. 그렇게 퇴로가 없는 효원에게 극단은 융화되고 싶은 가족이, 수연(이승연)은 대체하고 싶은 자신의 부모가 된다. 비극은 자신의 일부인 은서와 인철이 자기 세계의 변형을 가로막는 장애물로 여겨진다는 것이다. 심적인 의미에서 이것은 진실이다. 눈앞의 기회를 놓치면 끝장이라는 공포와 압박감에 효원은 죄책감을 느낄 새도 없이 단숨에 그들을 떠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극단으로부터 그리고 수연으로부터 다시 버려진다. 뒷일을 생각할 겨를이 없는 자살 생존자가 가장 가까운 지인들을 배신하고 꿈을 향해 돌진했음에도 침몰하고 마는 이 사태는 처참하다. 그런데 이 처참은 어딘가 모르게 보는 이를 개운케도 한다. 삶의 벼랑에서 죽음을 무릅쓰고 세계와 아귀다툼을 벌인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소진감이라고 해야 할까. 모든 것을 소진했다는 것은 모든 것을 사용할 수 있었다는 말이므로 그것은 곧 생명의 징표다.
욕조에 대한 환상 때문에(아마도 은서의 집에는 욕조가 없었을 것이다) 망가지기 쉬운 플라스틱 욕조라도 욕실에 들이고, 면접장에서는 지레 겁을 먹고 부모님 동의서를 집에 놓고 왔다는 신경질을 내며, 아무 잘못도 없는 인철을 화풀이 대상으로 삼는 은서의 행동은 묘하게도 불쾌감을 자아내지 않는다. 다만 카메라에, 아니 우리의 눈에 들어오는 건 연약한 청소년의 육체로 음각되는 은서의 위태로움이다. 성인 캐릭터라면 관객에게 묘한 짜증을 유발할 이 행동의 연쇄는 오히려 은서가 아이임을 드러내는 시각적 증언이 된다. “고등학생을 데리고 영화를 찍으려 하면 어쩐지 중학생처럼 보여 성인을 기용하게 된다”는 이란희 감독의 말처럼 성인이 연기하는 청소년에 익숙한 우리 앞에 던져진 이 작고 부서질 것 같은 육신의 청소년성은 그들이 겪는 망망함을 극대화한다. 이렇듯 <수련>은 시작부터 끝까지 보는 이를 조마조마하게 만들지만 관객들에게 사랑받은 여타 영화들이 제공하는 어떤 온기를 선뜻 내놓지 않는다. 다만 그들은 구정물에서도 양분을 찾고 산소를 뿜어내는 수련처럼 살아 있다. 그리고 그 살아 있음 안에서 그들은 물살에 이끌리듯 군집을 이루고 켜켜이 쌓인다. 삶은 그다지 더 나아지지 않을 것이다. 관계 또한 다시 고장 나거나 바스러질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생각 외로 잘 죽지 않아서 그들은 어느새 다시 서로의 잎 위에 서로의 몸을 얹고 말 것이다. 이 완충재 없는 무참함이 관객을 끌어모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이것만은 확실하다. 스크린 앞에 앉아 빛을 쐬는 것이 아니라 되레 그 빛에 찔리는 일은 일생에 몇 번 할 수 없는 영화적 경험이다. 해설로서의 비평이 필요치 않은 이런 영화는 극장을 자주 찾아오지 않는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