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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지애 (2024 영화의전당 영화평론대상 수상자)

<리틀 드리머즈> : 남겨진 꿈들이 머무는 숲에서
영화 <리틀 드리머즈> 스틸컷 이미지



<리틀 드리머즈> : 남겨진 꿈들이 머무는 숲에서


장지애 2024 영화의전당 영화평론대상 수상자


이광호의 <리틀 드리머즈>가 숲이라는 시공간을 다루는 방식은 자못 끈질기다. 영화의 서두와 결말을 포섭하는 나무 무성한 숲은 길을 잃게 하는 장소이면서 동시에 새로운 길을 발견하게 하는 장소다. 이곳에서 숲은 ‘해결되지 않는 문제’의 단순한 은유라기보다 해결을 향해 끊임없이 움직이지만 아직 완전히 해결될 수 없는 삶의 상태 그 자체에 가깝다.


<리틀 드리머즈>에서 숲은 마음의 내부를 투영하는 거울인 한편, 시간의 방향이 흐트러지는 장소다. 현실의 시간 체계 안에서 과거와 현재, 미래는 비교적 분명한 선후 관계를 맺는다. 이미 지나간 일은 되돌릴 수 없고 아직 오지 않은 일은 알 수 없다. 그러나 꿈속의 숲에서는 이 견고하던 질서가 느슨해진다. 미래를 미리 보는 꿈과 지나간 시간을 다시 만나는 꿈이 한 공간 안에서 겹쳐지는 것이다. 


영화 <리틀 드리머즈> 스틸컷 이미지2


이처럼 뒤틀리는 시공간은 벼랑 끝에 몰린 두 주인공의 처지와 정확하게 맞물린다. 부상과 사업 실패로 빚을 떠안은 채 자기방어의 가시를 세운 건우, 그리고 어머니의 부재 이후 타인과 연결되는 사슬을 천천히 끊어버린 미나. 두 사람은 현실의 극단에 위태롭게 서 있다. 건우의 눈에 현실은 이미 실패가 확정된 자리로 다가오며, 미나에게 현실은 상실의 아픔 속에서도 삶을 지속해야 한다는 잔인함을 매일 확인시키는 무대다. 둘은 완연히 다른 삶의 궤적을 그려왔음에도 눈앞의 세계를 향해 보이지 않는 단단한 벽을 세워두었다는 점에서 깊이 닮아있다.


그 벽은 단순한 고립에 머물지 않는다. 가까운 친구나 이모가 건네는 염려와 돌봄마저, 두 사람에게는 자신들의 삶을 멋대로 판단하고 정형화하려는 무거운 압박으로 느껴진다. 이들이 갈구하는 것은 동정 어린 시선이 아니다. 단지 피보호자나 돌봄의 대상으로 분류하는 시선에 저항하며, 삶의 막막함과 꿈을 향한 열망을 동일한 눈높이에서 나눌 수 있는 ‘같은 삶의 태도’이자 동등한 마주침을 간절히 바란다. 날마다 마주치는 이들과도 선뜻 마음을 나누지 못하는 그들에게 숲이 낯설면서도 이상하리만치 평온하게 느껴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곳은 수면을 통해 진입하는 꿈의 영역이며, 현실의 타당한 지적이나 섣부른 돌봄이 미치지 못하는 무중력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영화 <리틀 드리머즈> 스틸컷 이미지3


이 고립된 인물들을 서로에게 이어주는 것은 현실적인 대안이나 친절한 위로가 아니다. 바로 ‘요섭’이라는 설명 불가능한 존재다. 하늘에서 떨어진 푸른 방울과 함께 출몰한 요섭은 현실의 물리적 법칙으로 해독하기 어려운 인물이다. 어느 날 세탁기 속으로 홀연히 자취를 감추는 이 아이의 출처나 정체를 명확히 규명하는 일은 영화에서 그리 중요하지 않다. 핵심은 아이가 건우와 미나 앞에 나타났다는 사실 그 자체이며, 사라진 그를 함께 추적하는 과정에서 두 사람이 자연스럽게 서로의 곁을 지키게 되었다는 점이다.


영화 속 요섭은 아직 현실에 착지하지 못한 무엇에 가깝다. 성취되지 못한 꿈, 지나가 버린 가능성 혹은 팍팍한 나날을 견디느라 내던져둔 마음의 옛 모양이 어린아이의 형상으로 물질화된 셈이다. 하나의 완결된 인물이라기보다 일종의 ‘가능태’로 작동하는 요섭은, 아직 결정되지 않았기에 무엇이든 될 수 있으면서도 바로 그렇기에 아무것도 아닌 채 연기처럼 소멸할 위험을 동시에 품는다. 


요섭이 건우에게 건네는 예지몽 역시 독특한 영화적 장치로 기능한다. 꿈을 통해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을 미리 본 건우는 현실에서 5천만 원이라는 뜻밖의 행운을 거머쥐게 된다. 이 순간만을 떼어놓고 본다면 서사는 지극히 관습적인 궤도를 따라갈 수도 있었다. 우연히 찾아온 거액의 돈이 인물의 파산한 삶을 어떻게 뒤흔드는지, 그 돈을 둘러싸고 어떤 사건들이 연쇄하는지가 서사의 주된 동력이 될 법도 했다. 그러나 <리틀 드리머즈>는 관객이 기대할 법한 성공의 서사를 과감히 비껴간다. 뜻밖의 수표보다 그 꿈을 가능하게 했던 요섭이라는 존재 자체에 카메라의 시선을 고정한다. 관건은 ‘꿈을 통해 무엇을 얻었는가’가 아니라, 꿈이 사라진 자리에 ‘무엇을 찾아 길을 나섰는가’에 놓여 있다.


영화 <리틀 드리머즈> 스틸컷 이미지4


바로 이 지점에서 <리틀 드리머즈>의 가장 흥미롭고 결정적인 역설이 솟아오른다. ‘혼자 꾸는 꿈은 미래를 향하지만, 서로의 꿈에 진입하는 순간 그 꿈은 과거에 머문다’는 것. 각자가 홀로 꿈을 꿀 때, 특히 그 꿈이 수면의 상태이자 개인의 영토 안에 갇혀 있을 때 시제는 ‘여전히’ 미래를 향해 달린다. 도래하지 않은 행운, 아직 오지 않은 성공, 고통이 마침내 끝난 이후의 시간에 대한 열망이 그 사적인 꿈을 채운다. 건우 혼자 경험하는 예지몽 속 미래 또한 아직 다다르지 않은 사건이며, 현실보다 앞서 나아가 유토피아적 가능성을 예고한다.


그러나 미나와 건우가 함께 사라진 요섭을 찾아 나서는 순간 그리고 요섭을 통과해 서로가 타자의 꿈의 세계로 진입하는 순간, 꿈의 성격은 근본적으로 변모한다. 그들은 더 이상 다가올 내일을 기다리지 않는다. 대신 사라져버린 존재의 흔적을 ‘대신’ 쫓기 시작한다. 예컨대 ‘나’의 미래를 알려주는 예지몽으로 열렸던 서사는 ‘너에게’ 무엇이 사라졌는가를 묻는 서사로 고개를 돌린다. 시간의 축이 완전히 반대 방향으로 뒤집히는 것이다. 


<리틀 드리머즈>에서 가장 사적인 영역인 꿈의 숲에 타자가 발을 내딛는 순간 기억을 공유하는 장소로 고쳐 쓰인다. 어째서 타인의 꿈에 진입할 때 시간은 역류하는가. 타인의 공간에 들어선다는 것은 상대가 품은 미래의 환상을 나눠 갖는 일이 아니라 그가 깊이 묻어두었던 과거의 상처와 기억 속으로 함께 걸어 들어감을 의미하기 때문일까? 


영화 <리틀 드리머즈> 스틸컷 이미지5


영화에서 중요한 것은, 건우와 미나가 현실에서 겪는 어려움의 본질은 아직 오지 않은 내일에 대한 두려움보다 이미 지나간 과거의 중력에 묶여 있다는 데 있다. 건우의 현재를 규정하는 것은 이미 지나간 부상과 사업 실패의 흉터이며, 미나의 현재를 짓누르는 것 역시 돌이킬 수 없는 어머니의 죽음이다. 지나간 시간을 보내주지 못해 현재라는 자리에 멈춰 서 있는 셈이다. 그렇기에 이들에게 “다시 미래의 꿈을 꿔라.”라며 내일을 독려하는 당위적 위로는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어떤 꿈은 이미 과거에 깊이 묻혀 발목을 잡혀 버렸기 때문이다. 건우에게 야구는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직업이라기보다 한때 자신이 무엇인가가 될 수 있다고 믿었던 빛나는 시간의 잔해이고, 미나에게 어머니는 결코 되찾을 수 없는 부재 그 자체임으로. 


따라서 두 사람이 서로의 꿈속에서 마주친다는 것은 미래의 가능성을 교환하는 행위가 아니다. 각자가 잃어버린 시간의 잔해를 상대방 앞에 숨김없이 드러내는 일이다. 요섭은 미래를 보여주는 존재 같았으나, 정작 그를 찾아 나선 이들을 각자의 지나간 시간과 마주치게 만들었다. 때문에 <리틀 드리머즈>의 숲은 무의식의 도피처가 아닌, 미래를 꿈꾸던 이들이 과거를 다시 만나는 시간의 장소로 재정의된다. 인물들은 숲속을 함께 거닐며 지나간 시간, 잃어버린 사람 그리고 현실에서 차마 밖으로 꺼내지 못했던 감정들과 직면한다. 영화는 이 과정을 통해 꿈에 대한 우리의 통념을 고요하게 비튼다. 꿈은 현실을 당장 바꿔주거나 매끄러운 미래를 보장하는 도구가 아니라, 다만 타인의 결핍과 나의 결핍이 교차하는 불투명한 공간을 열어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