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윤 평론가
| <오디세이> - 우리의 환대 |
|---|
![]() <오디세이> - 우리의 환대 이동윤 (부산영화평론가협회) <오디세이>는 유독 멈춰섬이 잦다. 그의 최고작이었던 <덩케르크>(2017)가 액션이 아닌 리액션의 전쟁영화로 전장을 끌고 갔다면 <오디세이>는 진격이 아닌 정지 상태의 전쟁 서사시로 기능한다. 목마 안에서 병사들이 숨죽인 채 밤이 새도록 정지해 있다가 트로이를 함락시키는 그 밤과, 놀란이 트로이 함락 장면을 시간 순서 없이 여러 번 반복해서 보여주는 방식이 대표적이다. 전장에서도 혹은 과거를 회상하면서도 놀란은 이 정지 상태를 지속시키는데, 그렇기에 이 영화를 보고 나면 드는 즉각적인 감정은 피로감이다. 물론 놀란 영화야 늘상 구조를 비선형으로 꼬며 관객에게 일종의 게임이나 오락 체험의 공간으로 인도해냈지만 그렇기에 <오디세이>의 경우 유독 피로하게 느껴졌다. 놀란의 카메라는 트로이의 장엄한 성벽을 소비하는 일에 역시나 무관심하다. 대신 피떡이 된 갑옷도 벗지 못한 채 바닥만 멍하니 응시하는 오디세우스(맷 데이먼)의 굽은 등을 집요하게 훑을 뿐이다. 이 장대한 호흡을 그저 기나긴 전쟁이 남긴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로 불러도 되는 걸까. 어쩐지 그렇게 이름 붙이고 넘어가기엔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 오디세우스의 눈동자에 어른거리는 건 전장의 잔상이라기보다, 자신이 그 지옥을 직접 설계한 가해자였다는 자각에 더 가까워 보인다.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도덕적 부상이라고 해야 할까. 영웅의 투구를 벗겨내자 남은 건 결국 자기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너무 잘 아는 한 남자뿐이다.
돌이켜보면 놀란은 <오펜하이머>(2023)에서도 비슷한 질문을 던진 바 있다. 인류 역사상 가장 강력한 무기를 만든 남자가 그 죄의식과 어떻게 동거하는가 하는 질문. <오디세이>는 그 질문을 청동기 시대의 신화로 옮겨놓은 셈이지만, 다만 이번엔 무기가 아니라 계략이다. 놀란이 진짜 두려워하는 것은 트로이 목마 작전이 실패했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것이 '너무 완벽하게 성공했다'는 사실 자체였던 것 같다. 소리를 지운 채 불타는 트로이의 학살 장면은 철저히 가해자의 시점에서 담아낸 도살장의 풍경처럼 보이는데 이를 2026년으로 옮겨도 유사한 이미지는 손쉽게 볼 수 있다. 하나 짚고 넘어갈 것은 극 중 반복해서 소환되는 '제우스의 법‘, 즉 크세니아다. 낯선 타인을 환대해야 한다는 절대적 규범을 다시 돌이켜보자. 오디세우스는 이 규칙을 어긴 정도를 넘어서서 환대의 룰을 가장 효율적으로 악용해 상대를 도륙하는 방식을 택했다. 환대를 믿어야만 굴러가는 세계에서 가장 치명적인 전략이 결국 타인의 믿음을 배신하는 것으로 증명되는 셈이니 이보다 잔인한 역설, 그 역설을 가장 거대한 쇼로서 행한자가 오디세우스라는 점은 복기할만하다. 이 지점에서 놀란이 담고자하는 태도가 드러나는데 승리를 위해 인간 사이 최소한의 금기를 깨버린 대가는 결국 누구도 다시는 서로를 믿을 수 없는 세계로 이어진다. 완벽했던 간계가 스스로를 불신이라는 감옥에 가둔 셈이다. 이 도덕적 상처가 가장 날카롭게 파고드는 대목은 아무래도 망자의 땅, 하데스 시퀀스일 것이다. 살아 있는 동안 끝내 외면했던 참혹한 청구서가 마침내 오디세우스 앞에 당도하는 순간. 피와 먼지를 뒤집어쓴 채 나타난 병사 시논(엘리엇 페이지)은 목마 작전을 위해 버려졌던 장기말이었고, 승리라는 화려한 성과 뒤에 가려졌던 폭력의 비용을 자기 찢긴 몸으로 증명해 보인다. 뒤이어 나타나는 아가멤논(베니 사프디)의 유령도 뼈아프긴 마찬가지다. 승리를 위해 규범을 내던진 자들과 약탈을 일삼는 '바다의 사람들'이 대체 뭐가 다르냐는 힐난 앞에서, 나는 이곳이 외부의 심판대가 아니라 오디세우스 스스로 세운 가혹한 내면의 법정이라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카메라는 망자들을 신비롭게 그리는 관습적인 방식을 거부한 채, 그들의 텅 빈 눈과 오디세우스의 일그러진 얼굴을 건조하게 번갈아 비추며 압박감을 극대화한다. 망자의 땅을 빠져나온 뒤 펼쳐지는 귀향길도 사실 이 내면의 법정이 연장된 공간에 가깝다. 칼립소(샤를리즈 테론)의 섬에서 연꽃을 삼키며 흘려보낸 시간은 도덕적으로 무너진 기억을 견딜 수 없어 자아를 마취시키려 한 발버둥처럼 보인다. 이 여정 내내 오직 오디세우스의 눈에만 보이는 아테나(젠데이아)도 같은 맥락에서 읽어야 하지 않을까. 트로이 함락 당시 무참히 살해당한 사제의 모습을 하고 나타나는 그녀는 오디세우스가 잊고 싶었던 일을 계속 다시 복기하게 만든다.
다만 이 영화를 죄책감에 짓눌린 한 남자의 비애로만 요약하기엔, 놀란은 그 너머의 상위 개념까지 함께 끌어온다. 그런 만큼 그는 오디세우스를 섣불리 용서받은 피해자로 포장하지도 않는다. 환각에 시달리면서도 오디세우스는 끝까지 제 손으로 칼을 쥐고 피 튀기는 폭력을 멈추지 않는다. 죄책감을 느끼는 것과 그 죄에서 스스로 걸어 나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라는 걸, 영화는 꽤 날카롭게 갈라놓는다. 영화가 끝나고도 이상하게 오래 남는 건 오디세이의 정지된 상태이다. 침입자들을 처단하는 이타카에서의 마지막 복수극조차 카타르시스 없이 둔탁하고 기계적인 살육전으로 그려질 뿐이다. 그 피비린내를 씻어낸 뒤 오디세우스는 페넬로페(앤 해서웨이) 앞에 무릎을 꿇고 읊조린다. “단 한 번의 속임수로 가장 신성한 것을 영원히 깨뜨려 버렸소.” 이 고백과 함께 그는 아들 텔레마코스에게 권력을 넘기고 스스로 왕관을 내려놓는다. 왕이 아니라 그저 한 인간으로 돌아가는 것. 놀란이 이 잿더미 위에서 오디세우스에게 끝내 허락한 귀환은, 어쩌면 그게 전부였는지도 모른다. 목적을 위한 효율적인 기만이 세계의 윤리마저 무너뜨릴 때, 완벽한 승리를 손에 쥐고도 기어이 자기 자리를 내려놓고 떠나는 한 남자의 뒷모습. 그 뒷모습이 유독 오래 남는 건 어쩌면 지금 우리가 그런 뒷모습을 너무 오랫동안 보지 못했기 때문은 아닐까. 그 지점에서 <오디세이>가 놀란의 최고작은 아닐지언정 가장 유효하며, 큰 질문을 던지는 영화라는 생각이 든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