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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운 시선

<검치호>: 죽음의 골짜기를 넘어간 소녀
영화 <검치호> 스틸컷 이미지



<검치호>: 죽음의 골짜기를 넘어간 소녀


김현진 (부산국제영화제 시민평론단)


영화 <검치호>는 스트리밍으로 음악을 듣는 이 시대에 튀어나온 LP판 같은 영화다. 이건 대놓고 레트로이고 올드스쿨이다. 이강욱 감독은 자신을 사로잡았던 과거 홍콩 액션영화들에 대한 향수와, 그 시대에 활동했던 한국의 액션 스타 왕호와 원진에 대한 애정과 경의를 도저히 참을 수 없었던 것 같다. 그 시절 그 영화들과 배우들에 대한 추억이 없는 관객들은 이 영화를 보고 어리둥절하거나 시큰둥할 수도 있겠다. 누군가 그렇게 반응한다고 해도 그게 <검치호>의 실패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강욱 감독은 자신이 진심으로 보고 싶었고 만들고 싶었던 영화를 자신의 우상들과 함께, 그 시절 영화의 느낌으로 만든, 소위 성공한 덕후이기 때문이다.


영화 <검치호> 스틸컷 이미지2


부산의 어느 병원. 병든 엄마를 돌보는 소녀(박지희 배우)는 사는 게 너무 힘들다. 자신 외에는 엄마를 돌볼 사람이 없기에 학교를 자퇴해서 친구들과도 멀어지고, 유일하게 문병을 온 가족인 이모는 소녀의 엄마가 죽으면 나올 보험금에만 관심이 있고, 내야할 병원비도 계속 밀려있고, 엄마는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그런 소녀를 지켜보는, 같은 병실에서 자신의 아내를 돌보는 노인(왕호 배우)이 있다. 딸이 비극적인 죽음을 당한 이후 아내는 충격으로 정신이 이상해졌고 그는 우울감과 트라우마에 빠져있다. 같은 처지인 소녀와 노인은 점점 서로에게 마음을 열어간다. 어느 날 총상을 입은 고려인 출신의 러시아 마피아가 병원 응급 환자로 후송되어 오고, 소녀는 그의 가방을 줍게 된다. 그 안에는 실탄이 든 권총이 있었다. 고려인은 조직 내부의 싸움 틈에 다이아몬드 뭉치를 들고 도주했었고, 그 다이아를 차지하려는 비리 형사 3인조가 고려인과 권총의 행방을 찾아 병원에 도착한다. 형사들은 소녀를 압박하여 권총을 뺏으려 한다. 여기에 노인의 정체를 아는 킬러 애꾸(원진 배우)까지 가세한다. 노인과 소녀는 악당들과의 대결을 피할 수 없다.


<검치호>는 과거에서 온 영화임을 숨길 생각이 전혀 없다. 듣기에 생소한 주인공과 악당의 별명부터 그렇다. 노인의 별명 ‘검치호’는 지금은 멸종된, 거대한 송곳니를 가진 호랑이를 닮은 맹수를 말한다. 이는 젊은 시절 한국과 홍콩을 오가며 액션 스타로 활약했으나 긴 세월동안 영화계에서 볼 수 없었던 배우 왕호의 경력에 대한 비유처럼 느껴진다. 애꾸의 별명 ‘칠점사’는 까치살무사의 별칭으로, 머리에 점이 일곱 개 있는 뱀이란 뜻이다. 무협지에서 숱하게 보았던, 다소 허황되게 보일 수도 있는 이런 설정들은 부산이라는 현실적인 공간을 만나 묘한 균형을 이룬다. 비리 형사 3인조를 연기한 박훈영, 신철용, 탁기영 배우를 비롯한 <검치호>의 조, 단역 배우들은 대부분 이강욱 감독의 학교 선후배거나 지인들이다. 그들이 연기하는 건조하고도 투박한 느낌의 부산 사투리는 영화의 예스러운 스타일과도 잘 어울리면서, 영화가 마냥 허황되게 느껴지지 않도록 현실성을 더하는 역할을 한다. 이 영화가 전부 매끈한 억양의 서울말로만 진행되었다면 과연 더 나았을까?


앞서 말한 대로 <검치호>의 많은 것들은 과거 홍콩 느와르라고 불렀던 홍콩 액션영화들에게서 왔다. 딸을 잃고 정신적으로 무너진 삶을 사는 노인과 아내의 설정은 <영웅본색 2>에서, 비리 형사들과 고려인 마피아들 간의 총격전에서 나온 차분한 움직임은 두기봉 감독의 액션영화들에게서 온 것이다. 이것 외에도 이 영화가 인용해온 장면들과 출처인 영화들의 제목을 일일이 열거할 수도 있겠지만,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말을 아끼도록 하겠다. 홍콩 느와르는 당시 홍콩의 중국반환을 앞둔 시기를 살아가던 홍콩인들의 출구가 보이지 않는 느낌, 그 불안을 표현한 장르로 알려져 있다. <검치호>의 소녀와 노인의 슬픔과 우울 역시 홍콩 느와르의 그 정서와 비슷하다. 영화는 답답한 느낌을 주는 병원에서 어둡고 조용하고 느리게 시작하여, 노인과 소녀가 대화를 나누고 감정을 교류하는 순간부터 서서히 영화의 속도를 높여가고 탁 트인 야외에서의 혈투로 이어진다.


영화 <검치호> 스틸컷 이미지3


<검치호>의 액션을 말하자면 이 역시 예스러운, 고전적인 클래식 스타일이라고 해야 될 것 같다. ‘검치호’ 노인과 ‘칠점사’ 애꾸의 칼부림 대결이 특히 그러하다. 이들의 몸놀림은 서로를 죽이려 기를 쓰고 막 달려드는 한국형 ‘개싸움’ 액션이 아니라, 과거 홍콩 무협영화에서 봤던 일대일 무술 대결에 가깝다. 그들은 굳이 점프를 하고, 뒷걸음질 치는 대신 굳이 한 바퀴 몸을 돌린 다음 다시 자세를 잡는다. 애꾸를 연기한 배우 원진이 직접 무술감독을 맡은, 이 안무에 가까운 무술은 불필요한 동작들을 생략한 실전 싸움보다는 멋을 좀 더 강조한 동작들이다. 왜? 그것이 곧 왕호와 원진이 젊은 시절에 펼쳐보이던 스타일의 액션이기 때문이다. 왕호는 1952년 생, 원진은 1962년 생이다. 그들의 전성기는 오래 전에 지나갔겠지만, 그럼에도 우리 아직 안 죽었다며 여전히 건재한 현역이라는 걸 우리에게 증명하려 한다. 이 두 백전노장들의 대결이 감동적인 이유다.


<검치호>를 여러 번 보면서, 처음엔 몰랐는데 알게 된 사실이 있다. 단순히 액션영화를 만드는 거였다면 영화 속에 소녀가 없어도 이야기를 진행시킬 수 있었다는 점이다. 노인과 애꾸가 서로에게 원한이 있는 원수 관계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필연적으로 다시 만나 누구 하나 죽을 때까지 싸워야 한다. 그것만으로도 한 편의 액션영화를 만들 수는 있다. 하지만 <검치호>에선 소녀가 반드시 필요할 수밖에 없었다. 이 소녀는 그야말로 약자이기 때문이다. 나이, 경제력, 전투 능력 모든 면에서. 무협(武俠)이란 무엇인가. 무술로 협의 정신을 지켜내는 것이다. 그 협에는 약자를 보호한다는 것이 포함되어 있다. 액션만 화려한 채 이야기의 주제 면에서는 빈곤해서 실패하는 액션영화들이 상당히 많다. 그것은 무의 현란함을 과시하는 것에 정신이 팔려 협의 정신을 구현하는데 소홀했기 때문이다. 무는 넘치는데 협이 없다면, 그것은 힘센 자들의 힘 자랑에 불과하다. <검치호>는 다행히도 그 함정에 빠지지 않는다. 소녀가 있기에 이 영화는 무협의 진정한 의미를 완성할 수 있는 것이다. <검치호>는 소녀로 시작해 소녀로 끝난다. 소녀의 관점에서 이 영화를 무협영화의 방식으로 말하자면, ‘강호(江湖)’의 세계를 체험한 소녀의 성장기다. 박지희 배우가 연기한 소녀는 성에 갇혀 구조만을 기다리는 수동적인 공주의 역할이 아니다. 소녀는 자신을 괴롭히는 운명으로부터 도망치려 했다. 자신의 말대로 ‘죽기 싫지만 살기는 더 싫은’ 상태였다. 나쁜 어른들도 “차라리 죽는 게 안 낫나?”라고 말한다. 하지만 소녀는 살고 싶어졌다. 자신을 포함해서 자신이 지켜야 할 사람들이 있기에. 그때부터 소녀는 용감해진다. “살아라.”라고 말해주는 좋은 어른이 있기에 소녀는 앞으로도 꿋꿋이 살아갈 것이다. 약자를 보호할 줄 아는 어른으로.


영화 <검치호> 스틸컷 이미지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