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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피프레시 원고]피프레시 월요 시네마-<키메라>에 관하여
영화 <키메라> 스틸컷 이미지


[5월 피프레시 원고]피프레시 월요 시네마 - <키메라>에 관하여

  

5월 27일 김성욱 평론가 발제


국제영화비평가연맹(Fédération Internationale de la Presse Cinématographique. 이하 FIPRESCI/피프레시) 한국지부는 매달 마지막 주 월요일 오후 8~10시, 줌(Zoom)으로 월요 시네마 세미나를 열고 있다. 지난 5월 27일 김성욱 영화평론가가 알리체 로르바케르 감독의 <키메라>, 2024)에 대해 발제한 뒤 참가자들이 총 2시간 동안 열띤 토론을 이어갔다. 세 번째 줌 세미나에는 20여 명이 참여했다. 피프레시는 1930년 전 세계의 전문영화비평가와, 영화기자, 각국의 영화 단체들이 영화문화의 발전을 위해 결성한 단체로, 한국지부의 경우 1994년 창립됐다. 제1회 월요시네마는 심영섭 피프레시 한국지부 13대 회장이 <가여운 것들 Poor things, 2023>을, 제2회 월요시네마는 황영미 시네라쳐연구소장이 <오키쿠와 세계, 2024)를 발제했다.



-사회자: 안녕하세요, 여러분. 국제영화비평가연맹 한국본부 회장 심영섭입니다. 본 협회에서 주관하는 ‘월요시네마’, 5월 월요시네마 영화는 알리체 로르바케르 감독의 <키메라>(2024)입니다. 진행자가 아주 유명하신 김성욱 영화평론가십니다. 서울 아트시네마 프로그램 디렉터시고요. 아마 우리나라에서 영화 정말 많이 보신 분 중에 한 분이 김성욱 영화평론가라는 생각을 합니다. 어떻게 진행을 하실지 대단히 궁금하고요. 그럼 발제 부탁드립니다.


-발제자: 안녕하세요. 소개받은 김성욱입니다. 오늘, 알리체 로르바케르 감독의 <키메라>에 대해 이야기 나누려 합니다. 이 작품이 아직 온라인에서 볼 수 없는 상황이라, 구체적인 장면들에 대해 세부적으로 다루지는 못하고, 전반적인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알리체 로르바케르 감독은 세대적으로 보자면, 제가 가장 흥미롭게 생각하는 1970년대 후반에서 1980년대 초반에 태어난 세대의 감독 중의 한 명으로 그들 가운데 가장 매혹적인 영화를 만들고 있는 작가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들 세대의 작가들에게서 보이는 영화의 새로운 잠재력에 흥미를 느끼고 있습니다. 또한, 제가 극장을 하다보니 코로나 시기를 거치면서 영화관이라던가 영화의 필요성에 대해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는데, 그녀의 작업에서 영화의 중요성에 대해 새삼 크게 느끼고 있습니다. 올해 ‘무주산골영화제’에서 알리체 로르바케르 감독의 회고전이 개최되어 카탈로그에 짧은 글을 쓰면서 다시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늘 다룰 내용은 아니지만, 로르바케르 영화의 영적인 측면들, 정신적인 측면에도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좀 전에 제가 세대를 언급했는데, 참고로 로르바케르 감독은 1981년생입니다. 사실 70년대 후반에서 80년대 초반에 태어난 작가를 세대적으로 규정하는 것은 확립된 분류가 아닙니다. 이 세대의 작가를 예로 들자면 하마구치 류스케(1978), 쥐스틴 트리에(1978), 호나스 트루에바(1981), 기욤 브락(1977) 같은 감독들이 있습니다. 이들 세대는 디지털로 작업한 첫 번째 세대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영화 기술 분야에서 일어난 이 본질적인 변화가 영화 작업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논의가 있지만, 이들 작가들이 다큐와 픽션의 경계를 흐리는 작업을 즐긴다는 점도 주목할 만합니다. 물론, 예외는 있습니다.



필름 작업의 의미에 대하여


그중에서도 로르바케르 감독은 특히 필름 작업을 고수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선택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데뷔작 <천상의 몸>부터 로르바케르는 모든 장편 영화를 슈퍼 16mm 필름으로 촬영했습니다. 한국에서는 2010년 이전까지 슈퍼 16mm 촬영이 꽤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김태용 감독의 <가족의 탄생>과 류승완 감독의 <짝패>가 그렇습니다. 최근에는 이런 작업을 하는 감독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필름 작업은 촬영 감독 엘렌 루바르와의 협업을 통해 이루어졌는데, 이 선택이 디지털 세대에게는 전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기 때문에 흥미롭습니다. 그래서 왜 필름 작업을 계속하는지에 대해 질문할 수밖에 없는데, 로르바케르는 예상치 못한 작은 놀라움을 위해서라고 답합니다. 예를 들어, 엘렌 루바르는 <행복한 라짜로>(2018) 촬영 중 일부 실내 및 야간 장면에서 이미지가 어둡고 노출이 부족한 문제가 있었지만, 슈퍼 16mm 필름으로 촬영한 것은 ‘최종 결과물에 항상 작은 놀라움의 요소가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로르바케르는 데뷔작을 만들 때 모두가 디지털로 작업하라고 조언했지만, 자신의 이야기는 디지털로 전달할 만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녀는 디지털 작업의 효율성, 즉 많은 양을 촬영할 수 있다는 것이 모든 것을 촬영할 수 있다는 잘못된 인상을 줄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이를 피하기 위해 필름 작업을 선택했다고 합니다.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없는 필름 작업이야말로 예기치 않은 결과를 가져오는 신성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고다르가 말했듯이 무언가를 포기함으로써 다른 좋은 것을 얻거나, 다른 사람들이 갖고 있지 않은 가능성을 실현할 수 있습니다. 슈퍼 16mm 촬영은 디지털이라면 여러 번 기회를 가질 수 있고 현장에서 언제든 이미지 상태를 확인할 수 있는 것과는 다르게, 예기치 않은 것들이 영화에 개입할 여지를 주게 됩니다. 이는 그녀의 말처럼 의도된 결과만이 아니라 예상치 못한 결과를 받아들이는 ‘놀라움’을 영화에 도입할 수 있게 합니다.



에코 시네마와 양봉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까다로운 필름을 선택하는 것은 통제할 수 없는 환경과 새로운 관계를 시도하는 행위입니다. 그녀의 작업은 실제로 제작 관행에서 지속 가능한 영화 제작을 선도하는 에코 시네마의 모범 사례로도 유명합니다. <행복한 라짜로>는 유럽 최초의 친환경 영화 프로토콜인 에코무비의 대표적 사례 중 하나입니다. 이 영화는 농촌 사회의 붕괴와 현대성의 파괴, 자본주의와 환경 파괴에 대한 비판을 다루는데, 이 주제는 느린 영화 제작 방식을 고수함으로써 이미지의 정당성을 얻습니다. 모든 형태의 생명체가 항상 환경과의 관계를 통해 존재한다는 생각은 그녀의 모든 영화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등장합니다. 예를 들어, <천상의 몸>(2011)을 비롯한 그녀의 영화들은 모두 환경을 주제로 다룹니다.


에코 시네마와 관련해, 로르바케르 감독은 자신의 영화 작업의 이상을 ‘양봉’에 비유하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감독은 자유롭고 열심히 일하며 매우 중요한 동물인 꿀벌에 대해 강한 존경심과 동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꿀벌은 생태계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하기에 꿀벌이 멸종하면 지구에 재앙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꿀벌을 보호하는 것은 곧 지구를 보호하는 것이므로, 로르바케르는 영화를 통해 모든 형태의 생명체가 서식하는 지구에 대한 생태적 양심과 존중을 자극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로르바케르의 두 번째 영화인 <더 원더스>(2014)는 양봉을 하는 농촌 마을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1981년 토스카나 시골의 작은 마을 피에솔레에서 태어난 앨리스 로르바케르의 아버지는 실제로 양봉업을 하며 유기농 라임꿀을 생산하고 있습니다. 로르바케르는 양봉이 통제할 수 없는 벌과 관계를 맺는 것처럼, 영화 작업 또한 조심스러운 접근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모든 것을 통제하고 촬영할 수 없다. 한계에 대한 자각은 그러나 반대로 무언가 이러한 한계를 넘어서는 이미지가 도래할 것이라는 믿음을 갖게 합니다. 그리하여 촬영은 신성한 작업이 됩니다.

 


유산과 폐허의 상상


필름 작업은 영화의 고유한 역사와 깊은 관련성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합니다. 그녀의 신작 <키메라>가 그런 점에서 특히 흥미롭습니다. 이 영화는 도굴꾼의 이야기를 다룹니다. 하나의 이미지에서 출발해 이야기를 시작하겠습니다. 보여드리는 사진처럼, 인물들이 방치된 기차역을 방문하는 장면입니다.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이 영화도 이탈리아의 시골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탈리아 시골 풍경의 고풍스러운 매력은 과거 위대한 이탈리아 영화 감독들의 작품과 영화의 우화적 차원을 떠올리게 합니다. 페데리코 펠리니, 타비아니 형제, 그리고 특히 에르마노 올미와 파솔리니의 영화들이 그러합니다. 소박한 민속적 스토리텔링, 시간 여행을 통한 마술적 리얼리즘, 사실에서 영감을 받은 사회 드라마, 삶의 불확실성을 겪는 시골 사람들, 비전문 배우들, 그리고 그들의 신성한 믿음 등, 이 모든 것이 네오리얼리즘의 유산입니다.


대체로 ‘전통’이나 ‘유산’이라는 말을 들으면 일단 기피하려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로르바케르 영화의 매력은 그녀의 작품 안에 새로움과 오래된 것들의 유산이 공존한다는 점에 있습니다. 사라진 과거와 그것의 새로운 방식의 생존 및 재활성화가 로르바케르 영화의 정수라 할 수 있는데, 지금 언급하려는 장면에서 이러한 특징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이 낡고 오래된 기차역에서 대화는 이자벨라 로셀리니가 연기하는 플로라의 말로 시작됩니다. 그녀는 딸 베니아미나가 기차를 타고 여행을 즐겼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이탈리아는 방치된 역을 보고 플로라에게 이 역은 누구의 것이냐고 묻습니다. 플로라는 공공 건물이라 모두의 것이라고, 버려진 역이라고 답합니다. 나중에 주인공 아르투가 이탈리아를 다시 방문하는데, 그때 상황이 변해 있습니다. 이탈리아는 버려진 역을 개조해 아이들을 위한 숙소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탈리아는 누구의 것도 아니기에 우리 모두의 것이라고 아르투에게 말합니다.


이 기차역의 이름이 리파벨라인데, 토스카나 지역에 실제로 있는 역입니다. 우리 말로 하면 '리페어 뷰티', 즉 '아름다움을 수리하다', '복원된 아름다움'을 의미합니다. 기차가 운행을 멈춘 역이죠. 정확히 말하자면, 기능을 멈춘 역입니다. 한국에서도 이런 기능을 멈춘 역을 많이 발견할 수 있습니다. 조금 이상한 비교일 수 있지만, 저는 이 기차역 장면이 빔 벤더스의 <베를린 천사의 시>에서 피터 포크가 폐허가 된 베를린 거리를 걷다가 안할터 역의 빈터를 배회하는 장면을 떠올리게 했습니다. 그는 천사 다미엘과 접촉하는데, 그 장소가 바로 그 역입니다. 피터 포크는 안할터 반호프를 기차가 멈춘 역일 뿐만 아니라, 역 자체가 멈춘 역이라고 말합니다. <베를린 천사의 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베를린이라는 도시의 건축적 다큐멘트입니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이는 명백하게 애도의 작업으로 볼 수 있습니다. 역사적인 참조점에서 보자면, '폐허의 풍경'과 상상을 포함합니다. 폐허의 텅 빈 공간은 과도한 건축 공간에서 시각적인 일시정지 상태를 불러오는 장소입니다. 빈터와 공터는 공간 속의 여백이자, 시간 속의 여백입니다.


빔 벤더스의 <도시의 앨리스>에서 빈터와 앨리스가 앨리스의 할머니 집을 찾아 루르 지구를 차로 이동할 때, 앨리스가 버려진 집을 보며 이렇게 말합니다. "이 아름다운 오래된 집들이 허물어질 것 같아 슬퍼. 마치 빈 공간들이 무덤 같아. 집이 죽은 무덤이야." 이 애절한 은유는 텅 빈 공간을 과거를 간직한 기념물, 즉 박물관처럼 제시합니다. 마찬가지로, 리파벨라 역도 기능을 멈춘 무덤 같은 빈 공간이지만, 과거의 시간을 간직한 일종의 박물관 같은 곳입니다. 요점은 하나의 공간이 그 기능을 달리해 다른 가능성을 지닌 공간으로 변한다는 것입니다. 즉, 다른 관계를 만들 수 있는 공간으로 변형된 것입니다. 아르투가 나중에 보게 되는 것이 바로 그런 변화입니다. 버려진 리파벨라 역은 이탈리아와 다른 사람들이 작은 여성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선택한 장소가 되었습니다. 과거의 방치된 공간이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 함께 살고 일하는 공동체 공간으로 변모한 것입니다. 이 영화에서 거의 유일한 유토피아적인 비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공간은 이중적인 사이 공간이기도 합니다. 플로라의 말처럼, 도시와 시골 사이의 장소이며, 이 둘을 연결하는 역이 있던 곳입니다. 동시에 많은 여행자들이 만나고 통과하던 장소이기도 합니다. 모두에게 열려 있는 공간입니다. 플로라가 이 역에서 딸을 떠올리며 과거에 사로잡혀 있다면, 이탈리아는 반대로 이 버려진 역에서 미래의 발견을 떠올립니다.


이탈리아의 행위는 과거의 유물을 발굴하여 개인 소유로 만들어 판매하는 아르투의 행동과도 비교할 수 있습니다. 이 영화에서는 두 가지의 발굴 행위, 즉 과거 유산에 대한 두 가지 태도와 미래적 가능성이 제시됩니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에서 아르투의 도굴 행위에만 주목할 것이 아니라, 사실은 로르바케르 감독이 더 주목했던 것이 이탈리아가 버려진 역을 개조하는 데 있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이 두 기차역을 보여주는 장면은 영화의 핵심적인 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로르바케르 감독의 비전이 이 장면에 담겨 있습니다.


이 영화의 흥미로움은 버려진 물건들이나 과거의 유물을 기존과는 다른 방식으로 새롭게 활용하는 과정에 있습니다. 이는 앞서 언급한 대화에서 강조된 대로, "누구의 것도 아닌, 모두에게 속한" 공동 소유의 장소들을 새롭게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는 물건들의 재활용에 대한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을 우리는 '유산'이라고 합니다. 그런 측면에서 이탈리아의 적극적인 행동은 말씀드린 것처럼 유물 도굴꾼인 아르투의 행동과 대조적입니다. 로르바케르는 이 역의 변화를 통해 '유산'의 사적 소유와 공유의 대조를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유산'이라는 말로 저는 로르바케르의 영화가 '이탈리아 영화 유산'을 재활성화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많은 분들이 이 점에 대해서는 언급하고 있습니다. 로르바케르 감독은 네오리얼리즘 이후 이탈리아 영화를 새롭게 부활시키고 있다는 측면에서 주목받고 있습니다. 그 결과, 과거에 사라졌던 이탈리아 영화들이 새로운 방식으로 부활하며, 이를 통해 영화의 역할에 대한 새로운 논의가 이뤄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로르바케르 영화의 흥미로운 또 다른 점입니다.



발굴과 매장


시간이 많이 지나서 몇 가지 점만 말씀드려야 겠습니다. <키메라>는 이런 유산의 ‘발굴’이 두드러진 영화입니다. 발굴 행위는 죽은 자의 세계에 있었던 어떤 것을 산 자의 세계 안으로 이렇게 끌어오는 것입니다. 사실 그게 이 영화에서 뭔가 신비롭거나 매력적인 지점인데, 그럼으로 해서 영화가 이질적인 방식으로 나아가게 되고 불확실한 상태로 들어가게 됩니다. 땅을 파서 깊숙이 매장되어 있던 그 무언가를 끌어오는 발굴 작업은 불가피하게 어두운 지대를 통과하게 됩니다. 그 어두운 지대라는 건 대체로 터널이라든가 아니면 동굴이라든가 이런 것들인데요, 사실 이 행위가 앞서 말씀드린 영화의 정의를 떠올리게 하는 측면들이 있습니다.


시간상 여기서 소개할 여유는 없지만, <오멜리아 콘타디나>라는 짧은 단편이 있습니다. 이 영화는 발굴이 아니라 오히려 땅에 묻는 행위를 다룹니다. JR과의 협업으로, 농민의 죽음에 대한 장례식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단편의 마지막 대사는 영화의 핵심 주제를 반영하며, 로르바케르 영화의 핵심 주제 중 하나로 볼 수 있겠습니다. "당신들은 우리를 묻었지만 우리가 씨앗인 줄은 몰랐다"라는 대사입니다. 장례식은 농민들에게 부활을 축하하는 의식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표현은 도시적인 것과는 다르며, 농민들에게 땅에 묻는 것은 일종의 파종 행위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이는 죽음을 매장하는 행위가 단순히 종료되는 것이 아니라, 미래에 다른 것이 발생하기를 기대하는 행위임을 나타냅니다. 한 농민의 죽음 이후에 정치적인 저항에 대한 새로운 씨앗으로 해석될 수도 있습니다. 로르바케르 감독의 영화는 직접적인 정치적 주제를 다루지는 않지만, 함축적으로 정치적 주제들을 제기합니다.


다시 주제로 돌아가보면, <키메라>에서 시골을 배회하며 암시장에 팔기 위해 묻힌 에트루리아 무덤에서 유물을 훔치는 도굴꾼 아르투는 죽은 자의 장소에 민감한 감각을 가진 이로, 수맥 탐지봉을 사용하여 고대 무덤의 흔적을 찾고 있습니다. 이는 어두운 땅속 지하에 몇 세기 동안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던 곳에서 고대의 유물을 발견하는 과정을 묘사합니다. 이는 영화의 가시성 이미지와 관련이 있습니다. <키메라>에서 무덤을 파헤치는 행위는 어둠 속에 숨겨진 것들을 현실로 끌어내는 필연적인 과정으로, 이는 로르바케르 영화의 서막을 장식합니다. 그녀의 영화는 대개 어둠 속에서 작은 빛을 찾아내는 것으로 시작하며, 이는 밤의 어둠을 밝혀가는 행위를 상징합니다. 이것은 어둠 속에서 빛을 가져오는 순간이 때로는 폭력적인 행위로 비춰질 수 있다는 것을 또한 암시합니다. 그녀는 자신의 작품에 대해, 어린 시절 부모님과 함께 밤에 자동차 여행을 하면서 어둠에 가려진 것을 상상으로 본 경험을 언급하곤 합니다. 이는 그녀의 영화 작업에 직접적으로 반영되어 어두운 동굴에서 빛을 비추며 관객을 안내하는 시도로 이어집니다. 하지만, 말씀 드린대로 어둠 속에 빛을 가져오는 순간은 때로는 폭력적인 행위로 비쳐질 수도 있습니다. 이를테면, 로르바케르는 동굴을 탐험하며 만든 친구들의 슈퍼 16미리 필름을 보았던 일을 회상하며 빛이 동굴에 생명을 불어넣어 종유석을 볼 수 있게 해주지만, 동시에 동굴을 망칠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빛의 실타래


어둠을 통과하고, 그 안에 빛을 비추는 행위가 있다고 말씀드렸는데, 이는 극장을 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자면 영화관의 영화를 떠올리게 합니다. 극장에 들어서면 불이 꺼지고 프로젝터의 빛이 스크린에 비추어집니다. 이러한 어둠 속에서 빛이 나타나면서 영화가 시작됩니다. 어둠의 공간과 벽의 틈 사이로 들어오는 빛, 이 두가지가 영화의 성립 조건입니다. 마찬가지로, 로르바케르의 영화와 이미지도 어두운 동굴 속으로 빛을 비추면서 시작합니다. 요지는 이러한 어둠 속의 은 빛이 영화 매체의 가능성과 위험성, 그리고 환경에 내재된 해로운 영향에 대한 일종의 자기반성으로 해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영화 제작은 창조적인 과정이지만, 때론 파괴적인 행위입니다. 따라서 조심스런 태도가 필요합니다.


<키메라>에서 아르투가 기차 안에서 잠들어 있는 순간이 그러한 장면 중 하나입니다. 이어지는 환상적인 장면을 통해 우리는 영화의 본질에 대한 힌트를 얻습니다. 영화의 끝에 도달해서야 이 빛의 이미지가 의미하는 바를 이해하게 되지만, 초반의 빛과 그림자가 어울린 장면이 중요합니다. 여기서는 반짝거리는 빛과 창문 사이를 통과하는 빛이 돋보입니다. 아르투는 회상하는 과거의 이미지와 함께, 여자가 "빛이 우리를 쫓아오고 있는 것 같아"라는 말을 또한 떠올립니다. 이 장면은 영화의 본질을 드러내는 중요한 이미지 중 하나입니다. 몽환적이거나 반쯤 잠들어 있는 순간에 듣는 빛과 소리들은 영화의 원형적인 순간을 상징합니다. 롤랑 바르트는 영화관의 어둠 이전에 황혼녘의 몽상에 해당하는 모든 것들을 언급한 바 있는데, 바로 그런 이미지라 할 수 있습니다.


<키메라>에서 아르투의 발굴 작업은 어둠 속에 빛을 비추는 것이지만, 동시에 파괴적인 행위로도 이해됩니다. 이 혼란스러운 과정에서 아르투는 동굴 속에서 길을 잃은 사람처럼 방황하게 됩니다. 그를 다시 어둠의 바깥으로 이끄는 것은 붉은 색의 줄입니다. 이는 아리아드네의 실과 비슷한 구제의 실로, 크레타섬의 어두운 미로를 헤매지 않고 탈출할 수 있게 해줍니다. 영화 후반부에 동굴에 갇힌 아르투에게 이 붉은 실이 내려오게 됩니다. 이것은 빛의 실타래로도 해석될 수 있습니다. 영화 초반부에 빛이 우리를 따라오고 있다는 말이 반복해 나오는데,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는 이 붉은 실이 동굴의 구멍을 통해 들어오는 빛처럼 표현되어 있습니다. 아리아드네의 실은 어둠 속에서 길을 잃은 아르투가 바깥 세계로 나오게 해주는 빛이기도 합니다. 이 빛의 실타래는 마찬가지로 극장에서 빛의 투사와도 유사합니다. 어둠 속에서 빛이 나타나면서 영화의 세계가 펼쳐집니다. 이 놀라운 기적적인 순간은 실은 우리가 영화를 관람하는 동안 평범하게 경험하는 일입니다. 여기까지 이야기를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Q1. 사회자: 제가 먼저 한 가지 질문을 할까 합니다. 이 영화에서 굉장히 흥미로운 영화 연출 기법 중에 하나가 저는 롤샷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이 영화의 핵심 이미지 중에 하나가 거꾸로 서 있는 사내라는 생각을 했고 그 거꾸로 서 있는 사내는 결국 저승과 이승을 연결하고 또 산 자와 죽은 자를 연결하고 또 신화와 현실을 연결하는 그런 식의 중요한 미장센이라는 생각을 하고, 그것을 실제로 360도 롤샷을 통해서 표현합니다. CF에서 활용되는 감각적이고 화려한 그런 롤샷이 이 영화에서는 대단히 의미심장하게 사용되었습니다. 저는 도굴꾼이 도굴한 것을 다시 땅에 묻는다는 것도 재미있었습니다. 그리고 나뭇가지 두 개가 거꾸로 서 있은 사람을 의미한다는 것도 흥미로웠습니다. 롤 샷에 대해서 어떻게 봤는지 궁금합니다.


발제자: 말씀하신 게 거의 핵심적인 부분이라고 생각되고요. 어떻게 보면 거꾸로 선 이미지인데 사실 거꾸로 서 있다라는 게 중요성은 아닌 것 같고 선생님 말씀하신 것처럼 산 자 죽은 자 혹은 매장되어 보이지 않는 것과 보이는 것의 연결이라고 하는 것이 사실은 이 이미지의 핵심인 것 같습니다. 거꾸로 선 이미지는 포스터, 혹은 타로카드의 이미지이지만 실제로 영화에서 활용된 것은 그런 정적인 이미지가 아니라, 말씀하신 대로 한 바퀴를 이렇게 빙 도는 것이기에 그래서 정적인 이미지로 봤을 때는 거꾸로 쓴 이미지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영화의 장면에서 봤을 때는 연결의 맥락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거꾸로 선 이미지는 여러 형태로 반복되는데, 나중에는 더블의 느낌도 있습니다. 더블이라는 건 영화를 거꾸로 썼다라는 것만이 아니라 더블의 느낌이죠. 이를테면, 물에 비친 아르투를 보여주는 장면처럼 말입니다. 그런 장면들이 다 말씀하신 장면들과 연관성을 갖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Q2. 참가자 1: 아무리 생각해도 베니아미나의 죽음이 결국 아르투의 마지막을 급하게 마무리하기 위한 소모 장치로 끝난 것 같더라고요. 아르투가 죽은 베니아미나 때문에 도굴을 할 이유는 없는데 굳이 끼워 맞추자면 도굴을 함으로써 아내에게 더 가까워지고 외로운 자신을 파멸로 몰아간다는 걱정도 될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발제자: 베니아미나의 실체가 정확하게 설명되어 있지는 않아서 부인이라기보다는 과거에 사랑했던 여인 정도인 것 같습니다. 이 둘의 관계를 인물 간의 관계로 생각했던 것은 아니고, 이미지 측면에서만 생각했습니다. 베니아미나는 빛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빛의 형상인거죠. 그 빛의 형상이 끊임없이 아르투에게 나타나고, 그래서 이런 표현이 조금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빛의 증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자체로 무엇인가라기보다는, 그녀의 존재성이 무언가를 지칭한다라는 점에서의 증인 말입니다. 아르투가 왜 도굴을 하는지는 영화에서 설명되지 않는데, 그 이유가 다른 친구들과는 다르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죽은 베니아미나와 관련성이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도굴을 하고 땅을 파고 들어가 무언가를 발견하려는 행위가 그녀를 떠올리는 행위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녀와의 만남을 위한 것이기도 하고, 반대로 그녀의 죽음과 연관된 무언가로부터 벗어나려는 행위이기도 합니다. 베니아미나는 결과적으로 이 남자가 어둠 속에서 나올 수 있도록 도와주는 존재입니다. 영화 마지막 장면은 최종적으로 아르투가 그 빛이 무엇을 말해주는 것인지를 깨닫게 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Q3. 참가자 2: 저는 개인적으로 아르투가 땅에 들어가는 행위를 하는 게 베니아미나를 찾기 위해서라고 생각했는데요, 키메라 현상이 마지막에 있을 때 아르투가 이전과는 달리 별로 땅에 들어가고 싶어하지 않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거꾸로 뒤집하는 롤 샷도 이전에는 화면이 정말 전환이 되거나 뒤집히거나 그랬는데, 마지막 장면에서만 물에 비쳐 보이는 것이 다소 인위적이라고 느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까지는 정말 어떤 전체적인 세계가 뒤집히는 것 같았는데, 마지막에는 아로투가 나 들어가고 싶지 않아라고 하는 것 같이 느껴졌었어요. 이 부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요?

 

발제자: 여러 장면을 디테일하게 설명해 주셨는데, 마지막 장면을 어떻게 봐야 하는지에 대한 궁금증인 것 같습니다. 결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궁금한 관객들이 생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제가 이런 내러티브적인 질문을 그렇게 깊이 생각하지 않는 편이라서, 실은 말씀드리기가 어렵습니다. 이 마지막 장면이 조각을 맞추는 결과처럼 보이는 것은 사실입니다. 중간마다 나왔던 단편적 이미지들이 영화의 마지막을 위해 있었던 것처럼 느껴져서, 약간 그 신비로움이라는게 결과적으로 설명되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결말이 조금 마땅치 않다고 여기는 분들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결말에 대해 제가 뭐라 말씀드리기는 어려운게, 제가 이 영화에서 내러티브 문맥보다 빛의 형상에 더 관심을 갖고 있어서, 그런 점에서 주목해서 봤기 때문에, 아마 다른 분들이 이런 문맥에 대해서 더 잘 접근하시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Q4. 참가자 3: 조금 전 말씀하신 그 결말 부분부터 제가 생각한 걸 말씀드리자면, 사실 아르투는 도굴꾼이고 이방인이고 그렇게 신뢰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닙니다. 남성들이 굉장히 초조하고 불안한 반면 이 영화에서 여성 인물들은 유연한 인물로 나옵니다. 영화 속 인물을 신화적인 인물로 보자면, 플로라는 어떻게 보면 데메테르 같은 인물이죠. 그러니까 딸 페르세포네를 하데스의 죽음에 빼앗긴 그런 존재, 그래서 간절히 기다리고 있고 그녀를 찾아주는, 대행하는 일을 아르투가 하고 있습니다. 이탈리아라는 여자는 아까 말씀하신 것처럼 여성 공동체를 이룬 그런 여자로서, 현실에 어떤 구원자 같은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여성 감독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탈리에게 구원적인 위치에서 모성애적인 역할을, 약간의 초월적이고 선구자적인 역할을 부여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발제자: 이 영화에서 저는 아르투가 아니라 이탈리아가 핵심적인 인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르투와 이탈리아의 행위는 서로 비추는 부분이 있지만, 아르투는 반성적 측면이 있어서 종교적으로 말하자면 ‘회심’에 해당됩니다. 내러티브적으로 얘기하자면 명확한 설명이 필요하지만, 아르투의 회심이란 측면에서 보자면 어떤 문맥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은 아니어서 저는 다른 생각을 해보게 된 것입니다. 동굴의 어둠 속에서 불을 켜면서 조각상의 얼굴이 나타날 때 그 조각의 아름다움은 다른 한편으로는 어둠 속에 있어야만 하는 대상을 훼손하는 행위입니다. 이 조각상의 얼굴은 영화 첫 장면의 베니미아나의 얼굴처럼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여인의 얼굴을 반추하게 합니다. 그래서, 내러티브와는 크게 상관성이 없더라도 결과적으로 아르투는 반수면 상태에서 순간순간마다 이 얼굴을 떠올리게 되는데, 동굴 속에서 불을 켜는 순간 아름다운 여인의 조각상 얼굴을 보는 장면은 그녀를 떠올리는 행위와 연결점을 갖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르투는 말씀 하신 것처럼 이방인으로, 영국에서 온 사람입니다. 그가 이탈리아의 유물을 파헤치는 것은, 인터뷰에서 봤던 내용이긴 한데 감독은 스필버그의 <인디아나 존스>를 떠올렸다고 합니다. 어떻게 보면 이 영화와 관련해 연상된 여러 영화들 가운데 <인디아나 존스>가 가장 이질적인 작품인데, 그래서 아르투는 좀더 대중적인 상상력에서 기원한 인물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좋은 말로 하면 고고학자지만 이중성을 갖고 있는 이런 측면들이 아르투라는 인물에 투영돼 있기 때문에, 그래서 선생님이 얘기하신 것처럼 조금 더 설명적이거나 반성적인 측면들이 아르투에게 더 부각된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사회자: 제가 조금 더 말씀드리면 알리체 로르바케르 인터뷰를 읽으니까, 그 도굴 장면에서 빛이 이렇게 퇴색되는 장면은 페데리코 펠리니의 <로마>에 대한 오마주를 하고 싶었다고 감독 본인이 이야기를 했더군요. ‘조각상의 목을 자르는 장면은 마치 도굴꾼이 신성한 석상을 살인하는 것 같은데, 가격을 매길 수 없는 것에 가격을 매기는 것 자체도 사실 어떻게 보면 정말 물질주의적인 살인 행위가 아닐까’라고 감독이 인터뷰에서 밝혔다고 합니다.

 


Q5. 참가자 4: 저도 메타 시네마에 대한 부분이 은유되는 걸로 생각한 부분이 있는데, 평론가님하고는 좀 다른 관점이 있는데, 저는 아르투가 역상으로 보이는 게 롤 샷으로 보일 때도 있지만 여인상을 발견하는 장면에서는 롤 샷이 안 나오거든요. 거기서는 거꾸로 뒤집힌 숏이 한번 이렇게 발작하는 것처럼 살짝 나옵니다. 말씀하신 대로 마지막 부분은 물에 비치는 장면으로 나오는데, 그 역상이라는 게 암실에 빛이 들어와서 카메라 옵스큐라 원리에서 보면 피사체가 역상으로 맺히는 장면처럼 느껴졌습니다. 카메라의 원리가 영화에 그대로 온 거고, 그래서 저는 감독이 자전적인 측면이 있다 보니까, 로르바케르 감독이 이 주제를 정확하게 표현하기 위해 어떤 스팟을 찾는 상황에서 자기가 신들린 것 같은 그런 감각이 찾아오는 순간을 키메라 현상하고 연관지어, 영화를 찍는 행위와 연관해 그 역상을 생각했습니다.


말씀하신 역 장면을 저도 인상적으로 봤었는데, 평론가님 말씀을 들으니까 또 들었던 생각이 로르바케르가 인터뷰에서 에트루리아 문명에 대한 얘기를 하는데, 자기가 사는 마을 지역의 에트루리아 문명 유적이 실제로 발굴되는 지역이라고 합니다. 영화 속에서 어떤 여자분이 카메라 보면서 에트루리아 문명 시대에는 여성들이 더 주도를 했었다, 그래서 그게 로마로 변경되지 않았다면 마초 같은 사람이 이태리에 없었을 거다, 이런 얘기도 하거든요. 그런 맥락에서 아까 말씀하신 여성 공동체라는 거는 에트루리아 문명을 떠올리게 하는 측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 에트루리아적인 유산을 다시 되살리는 게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발제자: 물에 비친 역상의 이미지를 음화적 이미지, 혹은 카메라 옵스쿠라와 같은 것으로 말씀 하신 것은 재밌는 아이디어라고 생각합니다. 투사와 관련해서 부언하자면, 이 감독의 영화를 극장에서 보신 분이라면 어둠 속에서 이미지를 보고 있는 행위에서 영화를 보는 행위를 자문하게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영화를 본다는 것은 이미지를 보는 것만 아니라, 영화를 보고 있는 나를 둘러싼 어떤 현상을 떠올리는 행위잖아요. 그래서 이미지 안에 뭐가 있느냐는 것만이 아니라, 이미지를 보고 있는 나와 저 이미지가 현실과 맺고 있는 관계,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나와의 관계를 어떤 형태로든 관계짓는 행위이기 때문에 이런 부분들이 <키메라>에서 마찬가지로 이미지나 빛이 들어오는 순간에 중요하게 부각된다고 생각합니다. 즉, 투사 행위가 갖고 있는 기능과 역할, 중요성을 떠올리게 합니다. 스탠리 카벨은 영화가 무엇인가라는 질문 대신에 영화가 왜 중요한가, 영화 예술의 중요성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질문하는데, 마찬가지로 저는 로르바케르의 영화가 그 중요성을 환기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Q6. 참가자 5: 우선 ‘키메라’라는 제목을 처음 들었을 때 분명히 여기는 SF적인 설정이 있겠다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보통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그 세 가지 동물의 형상이 합쳐진 그런 괴물을 뜻하기도 하고, 일반적으로 영화에서는 여러 가지 생물종들이 합쳐진 그런 크리처물로 나오기 때문에 이 영화에서도 아마 그런 설정이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했었는데요. 근데 제 생각과는 다르게, 이렇게 표현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키메라는 영적인 상태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말씀드렸던 SF적 설정에 대해서도, 분명히 이 영화에는 현실과 동떨어진 픽션적인 설정들이 있는데 사후 세계로 가는 열차처럼 보이는 것이 나온다든지 그런 것들처럼 분명히 현실과는 동떨어진 설정이 있지만은 그런 것들을 영화에서는 배경 설명이라든지 이런 것들이 전혀 없이 짤막하게 보여지고 보는 입장에서는 굉장히 신비롭게 남겨져 있었습니다. 이런 설정들을 왜 더 밀고 나아가지 않고 그 자리에서 잠깐 세워두게 했는지가 먼저 궁금했고요. 또 이것은 전작인 <행복한 라짜로>에서도 들었던 느낌인데, 영화의 시대적 배경을 알기가 굉장히 어렵습니다. 이 영화의 배경이 1980년대라는 것은 제가 영화를 보고 나서 따로 기사를 찾아보고 나서 알았는데요. 왜 시대적 배경을 일부러 이렇게 단절되어서, 고전적인 환경인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는지에 대해서 궁금해서 질문드리고 싶습니다.


발제자: ‘키메라’에서 연상됐던 것은 혼종성이라고 해야 할까요, 그게 이 영화의 특징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이브리드성이라고 할 수도 있고, 혼종적인 매체도 있는데 말씀드린 대로 슈퍼 16미리, 16미리 필름이 중간중간마다 서로 이질적인 이미지들이 혼동돼 있고, 몇 가지 이야기들이 섞여 있고, 인물들의 혼종성도 있습니다. 그래서 아마 키메라가 지칭하는 것에 이런 혼종성이 있다고 생각되고, 영화의 이질적인 공동체성과도 연결된다고 생각합니다. 시간성은 저도 궁금한 지점인데, 로르바케르 감독이 2023년이나 2024년의 도시를 배경으로 영화를 찍으면 어떤 게 나올까가 궁금합니다.



Q7. 참가자 6: 일단 선생님께서 처음 시작할 때 리파벨라 역을 얘기하셨잖아요. 그러니까 리페어 뷰티라고 설명을 하셨는데, 제가 알기로는 리파라레가 이탈리아 말로는 ‘수리하다’, ‘수선하다라’는 뜻도 있지만 이게 ‘보호하다’, ‘지키다’라는 뜻도 있거든요. 영어의 리페어에는 보호한다는 의미는 없는 걸로 알고 있거든요. 이게 게르만 문화하고 라틴 문화의 차이로 이해를 했어요. 이 생각을 하니까, 혹시 이 영화에 게르만 문화하고 라틴 문화의 갈등이 있지는 않을까라는 생각을 해봤거든요. 왜냐하면 이 남자 주인공 아르투가 라틴어로도 아르투스라는 말이 있긴 있지만, 이게 원래 영국의 아서 왕을 얘기하는 거니까 앵글로 색슨족은 게르만족의 하나고요. 그러니까 게르만 문화와 라틴 문화의 충돌이 이걸로 설정되는 건 아닌가 싶습니다. 유물을 파헤치려 하고, 이탈리아라는 이름을 가진 여성은 그걸 지키고자 합니다. 아르투스가 또 어원상으로는 찾아보니까 북쪽의 곰이네요. 북극 곰 자리에 있는 목동 자리의 리더이기도 하고 그리고 또 베나미아나는 원래 벤자민의 여성 형이잖아요. 벤자민은 또 남쪽의 아들이랍니다. 여성이면 남쪽의 딸이 되는 거죠.


그러니까 남쪽 라틴 문화와 북쪽 게르만 문화의 충돌 이것은 이탈리아라는 이름으로 이름을 지키고자 하는 것이고, 에르투리아는 사실상 로마 부근 지역이거든요. 그러니까 로마가 에트로리아하고 갈등이라기보다는 에트로리아의 문화를 고대 방식으로 이어나간 것으로 저는 이해하고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이탈리아라는 이름을 가진 여성이 에트루리아 문명을 지킨다는 것은 곧 로마 문명을 지키는 것이고 그것이 이탈리아 문명을 지키는 것이 아닌가 이런 생각이 좀 얼핏 들었습니다. 그래서 과연 아르투하고 이탈리아, 베나미아나의 삼각 관계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영화에서 묘사되는지 나중에 추적해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