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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운 시선

[로컬 픽, 시간과 빛] 말과 여백 사이 : 사사로운 이야기
2026 부산로컬시네마 데이 <로컬 픽, 시간과 빛> 한 번만 더 / 낯선 사람들 / 한낮의 UFO를 믿으시나요 2026.4.17.(금) 19:30 인디플러스



[로컬 픽, 시간과 빛] 말과 여백 사이 : 사사로운 이야기


김현구 (시민평론단)


4월 [로컬 픽, 시간과 빛]에서 상영된 <한 번만 더>, <낯선 사람들>, <한낮의 UFO를 믿으시나요>는 영화 내·외적으로 개인적 인연이 있다. 소유현 감독님의 <한 번만 더>는 아랫글에서 밝히듯, 지난해 열린 27회 부산독립영화제에서 개막작으로 관람한 후 느낀 사적인 감상에서 시작하여 이곳 영화로운 시선의 글로 이어졌다. <낯선 사람들>의 이남영 감독님은 칸따삐아 필름으로 기억한다. 사적인 대화를 나눈 적은 없지만, 부산독립영화협회 정기총회와 지난해 5월 카페 인디샷 2층에서 진행된 ‘가끔 차담’ 때 뵌 적이 있다. 아! 27회 부산독립영화제 뒤풀이 ‘독립영화인의 밤’에서 “칸타삐야 필름은 어떤 곳인가요?”라고 질문을 한 사람이 본 필자이다. 역시 독립영화인의 밤에서다. 아는 사람 한 명 없이 멀뚱히 앉아 있던 나에게, 함께 식사하자는 선의 가득한 손을 내민 분이 <한낮의 UFO를 믿으시나요>의 김원우 감독님이시다. 감독님 덕분에 다정하고 우호적인 분위기 속에서 행사를 즐길 수 있었다. 그날 식사 자리에 함께 한 이강영 선생님도 생각난다. 영화를 공부하시는 이강영 선생님 덕분에 인생 영화에 대해 생각해 봤다.(내 인생 영화가 <패왕별희>라는 어쭙잖은 대답을 했다.) 그리고 질 들뢰즈의 철학을 쉽게 풀이한 책을 추천받아 읽고 있다.(쉽게 풀이했다지만, 쉽게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많아 끙끙거리며 읽고 있다.) 이렇게 사적인 이야기를 풀어놓는 이유는, 이번 ‘영화로운 시선’에 올릴 글을 쓰며 부산독립영화협회를 중심으로 끈끈하게 맺어진 부산 지역 영화 생태계를 떠올렸기 때문이다. 영화에 조금 관심을 가지고, 그 주변을 기웃거리는 시민으로서 부산 영화계의 중심과 근간이 되는 부산독립영화협회가 매우 든든하게 느껴진다.


더불어 함께 이야기하고 싶은 부분이 있다. 영화의 전당 독립영화 전용관 ‘인디플러스관’이 개관 10주년을 맞이했다. 인디플러스관에서 처음 본 영화는 홍상수 감독의 <밤의 해변에서 혼자>였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 게다가 그의 내밀한 개인사가 더욱 깊이 담긴 영화를 36석의 작은 상영관인 인디플러스관에서 본 감흥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이후로 부산 지역에서 만든 독립영화를 주로 인디플러스관에서 접했다. 부산 지역 영화에 대한 나의 관심은 모두 ‘인디플러스관’이 마련한 토양에서 자라난 것이다. 그리고 내가 처음으로 영화 GV 모더레이터를 한 곳도 ‘인디플러스관’이다. 나의 처음을 함께하고 영화를 보는 시야를 넓혀준 ‘인디플러스관’이 10주년을 맞이했다는 것은 의미 깊고 기쁜 일이다. 앞으로도 ‘인디플러스관’을 지지하고 아끼는 관객으로 남아, ‘인디플러스관’에서 수많은 영화적 체험을 함께하겠다. 독립영화 전용관 ‘인디플러스관’의 개관 10주년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영화 <한 번만 더> 스틸컷 이미지


<한 번만 더> : 의도된 실패


27회 부산독립영화제 개막식. 개막작인 <한 번만 더>(소유현, 2025)를 보고 나오며 이렇게 중얼거렸다. “수능 독서 지문 같은 영화네...”


수능 국어 영역에 출제되는 독서 지문은 설명문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수능에 나오는 독서 지문은 사실 실패한 설명문이다. 좋은 설명문이란 어려운 내용을 쉽게 풀이한 글이어야 하는데, 독서 지문으로 제시되는 설명문들은 어려운 내용을 어렵게, 심지어 쉬운 내용을 어렵게 설명하기 때문이다. 독서 지문의 난도를 높이는 방법은 간단하다. 문단과 문단을 자연스럽게 연결하며 문단 소주제들 사이의 충돌을 완화하는 구절을 삭제하거나, 접속사라고 불리는 표지어를 불친절하게 제시하면 된다. 이렇게 하면 문장과 문장, 문단과 문단이 방향을 잃고 떠돌며 글 전체의 의미 연결이 끊어진다. 독서 과목은 지문을 바탕으로 사실적 읽기와 추론적 읽기를 요구하는데, 의미 연결이 끊긴 지점에서 혼란을 느낀 수험생들은 독서 지문이 던지는 물음에 엉뚱한 답을 내놓고 마는 것이다.


독서 지문이 실패한 설명문이라 해서, 잘못 쓰였거나 수준이 낮은 글은 아니다. 독서 지문에 담긴 실패는 출제진의 의도된 실패이다. 수험생들이 의도된 실패를 극복하여 지문 속 사실을 파악하고, 숨겨진 내용을 추론할 수 있는지 알고 싶은 것이다.(물론 논리적 인과관계를 묻는 시험에서 이와 같은 물음이 적절한 방식인지는 의문이다.) 나는 수능 독서 지문을 접할 때마다 몸서리쳐질 만큼의 짜증과 불편함을 느낀다.(대입 시험 정도의 수준에, 그것도 객관식 시험에 이런 지문이 나올 일인가...) 반면 수능 독서 지문과 같은 영화를 만날 때가 있는데, 그럴 때마다 나는 온몸에 전율이 흐르는 듯한 희열을 느낀다. 서사의 흐름과 방향을 알려주는 표지어와 작은 이야기들을 자연스럽게 이어주는 장치가 사라진 영화, 그 안에서 발생하는 숏과 숏, 시퀀스와 시퀀스의 느닷없는 충돌이 매력적인 체험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사람마다 영화에 흥미를 느끼는 지점은 다르겠지만, 나는 인과관계로 빈틈없이 짜인 세상이 숨 막히게 느껴진다. 그래서 인과관계가 사라진 또는 의도적으로 논리 체계를 무너뜨리는 영화에 매력을 느낀다. 그리고 수능 독서 지문과 같은 영화 <한 번만 더>를 만난 것이다.


<한 번만 더>는 상담실에서 근무하는 희윤(김치성)과 지아(박신애)의 이야기이다. 희윤은 심리 상담극 대본을 쓰고, 지아는 대본을 바탕으로 연기를 한다. <한 번만 더>의 서사 구조는 단순하다. 그런데 <한 번만 더>는 동일한 톤의 흑백 화면으로 심리극과 심리극 바깥에 있는 현실을 모두 그려낸다. 그리고 상담실과 버스 정류장의 뒷배경에 단일한 패턴의 큰 벽을 세움으로써 화면의 깊이감을 제거하고, 이를 통해 <한 번만 더>의 장면들은 연극 무대 위에 올려진 것처럼 보이게 된다. <한 번만 더>는 심리 상담극이 이루어지는 장면과 상담극 바깥에 있는 현실을 동일한 톤으로 설정하고, 심리극과 현실이 모두 연극 무대 위에서 진행되는 것처럼 보이며 극과 현실의 경계를 의도적으로 흐트러뜨린다. 게다가 불친절하게 끊어지는 시퀀스들로 인해 이야기의 흐름과 방향도 맥락을 잡아내기가 쉽지 않다. 


<한 번만 더>가 보이는 내용과 형식 구조를 몇몇 장면만 가져와 파악했지만, 대략적인 분석을 통해서도 이 영화가 의도적인 실패를 감행했다는 점이 드러난다. 그렇다면 의도된 실패를 통해 <한 번만 더>가 나타내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한 번만 더>가 뚜렷하고 단일한 주제 의식으로 만들어졌는지는 알 수 없을뿐더러, 크게 주목되는 지점도 아니다. 오히려 <한 번만 더>가 서사와 형식의 오독을 무릅쓰고 의도적인 실패를 단행했다는 점에 눈길이 간다. 의도적인 실패를 통해 <한 번만 더>의 숏과 숏, 시퀀스와 시퀀스는 각자의 이야기로 진행되며 방향을 잃고 충돌하는데, 이 충돌과 혼란 속에서 <한 번만 더>는 다양한 이야기를 생성하는 듯하다. <한 번만 더>는 글을 쓰는 희윤과 글을 바탕으로 심리 상담 연기를 하는 지아가 겪는 충동에 관한 이야기일 수도, 하지 못한 말이 품고 있는 비밀에 대한 영화일 수도 있겠다. 또는 칵테일바에 앉은 중년 남자(이형재)가 쓰는 글 속의 이야기, 그 속에서 희윤이 쓰는 단편 소설의 이야기, 그 위에 지아의 시가 형상화된 이야기. 액자식 서사 구조처럼 이야기가 중첩되고 뒤섞인 영화이기도 하겠다. 그리고 이 모든 이야기의 파편들은 <한 번만 더>의 의도된 실패 지점에서 펴져 나오고 있다. 


영화 <낯선 사람들> 스틸컷 이미지


<낯선 사람들> : 영도대교와 흰 포말 


도개하는 영도대교를 바라보는 <낯선 사람들>(이남영, 2025)의 첫 장면은 끊어지는 길과 새로이 이어지는 길을 응시하는 듯하다. 하지만 <낯선 사람들>은 길을 끊어짐과 이어짐으로 양분하지 않는다. 다리 위의 길은 끊어지지만, 영도대교는 하늘 위로 활짝 열려 그 아래로 뱃길을 열어둔다. 영도대교가 열어둔 길을 지나온 배 한 척이 부산 바다 위에 흰 포말로 그려진 길을 남긴다. 끊어지며 이어지는 길, 그리고 바다 위에 자취를 남기는 길. 길과 길을 보임으로써 <낯선 사람들>의 첫 장면은 길 자체를 응시한다. 곧이어 <낯선 사람들>은 부산 앞바다를 바라보던 시선을 도심 위로 돌린다. 그리고 조감하는 시점으로 부산의 원도심 중앙동의 길에 첫 시선을 던진다. 


흰 포말이 남겨진 도시 부산, 영화 속 두 인물 혜성(박지혜)과 선우(허성웅)가 느슨한 걸음으로 중앙동을 거닌다. 혜성은 자신이 촬영할 영화에 담길 공간을 찾기 위해 선우를 따라 중앙동의 이곳저곳으로 걸음을 옮긴다. 이들은 영화에 담길 공간을 찾기 위해 길을 따라 걷지만, 순간순간 목표를 잊은 듯 길가에 서 있기도 한다. 이때 <낯선 사람들>은 길가에 우두커니 선 두 인물의 시선을 따라 하늘을 향해 카메라의 시선을 들어 올린다. 하늘을 향해 들어 올려진 시선 아래로 새로운 길이 열리기라도 하듯, 혜성이 건물 위에서 내려다보는 길 위로 남자와 여자가 지나가고 팔찌 하나가 덩그러니 놓인다. 혜성이 내려다본 길 위에 홀연히 나타난 인물과 사건은, 혜성에게 새로운 이야기로 자취를 남기는 것 같다. 그래서 혜성은 길 위에 밤이라는 시간을 덧붙여, 인물과 사건 그리고 배경을 갖춘 이야기를 만들어 내고 싶어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혜성은 길을 걸으며 자신이 제작할 영화에 담고 싶은 장소를 사진기로 촬영한다. 이때 혜성이 찍은 사진 속에 담기는 것은, 고장 난 업소용 냉장고의 유리문에 비친 선우의 모습이다. 냉장고 유리문에는 길 위에 선 선우의 모습이 비쳐 있다. 영화 <낯선 사람들>은 길 위에서 이야기가 생긴다고 믿는 듯하다. 그래서 이 영화는 인물들을 길 위에 올려놓는다. 그리고 혜성과 선우는 결국 길 위에서 이야기를 찾는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다시 길 위에 앉은 혜성은 할아버지(신대수)와 대화를 나누며 이야기를 찾는다. 혜성이 들고 있는 수첩은 다시 흰색의 빈 종이로 변해 있다. 길 위로 나선 혜성과 함께 수첩의 흰 여백은 다시 이야기로 채워질 것만 같다.  


시선을 고정한 채로 오랫동안 영도대교와 뱃길을 바라보는 <낯선 사람들>의 첫 시선은, 이 영화의 고유한 리듬과 얼개를 생성한다는 점에서 매혹적이다. 성급하게 이야기를 쫓지 않는 혜성과 선우의 느슨한 걸음은 <낯선 사람들>의 리듬을 유지하고, 길 위에서 이야기가 태어난다는 이 영화의 생각에 힘을 싣고 있다는 점에서 믿음직스럽다. 영도대교를 오래도록 지켜보는, 바다 위에 남겨진 뱃길의 자취를 포착하는 <낯선 사람들>의 시선에는 결국 길은 이어지고 그 위에서 이야기가 만들어질 것이라는 믿음이 담겨있다.


영화 <한낮의 UFO를 믿으시나요> 스틸컷 이미지


<한낮의 UFO를 믿으시나요> : 계단 앞에 선 얼굴들 

                                                                      

기자 지망생 문주(장문정)는 평소 존경해 온 기자 재흥(임호경)을 찾아간다. 문주는 재흥에게서 인생의 해답을 듣길 원하지만, 그녀의 앞에 놓이는 것은 “UFO를 믿어요?”라는 재흥의 당황스러운 질문뿐이다. 주저하는 문주에게 재흥은 아이폰 카메라로 찍은 UFO를 보여 준다. 그리고 문주는 또 다른 질문을 마주한다. 자기 눈으로 본 UFO를 믿어야 하는 것인가? 해답을 찾는 문주가 마주하는 것은 믿음에 관한 질문이다. 그리고 문주가 직면한 이 질문은 스크린을 벗어나 관객 앞에 당도한다. 왜냐하면 UFO를 믿냐는 황당한 물음으로 시작한 이 영화는 그 스스로 UFO가 되어 우리 앞에 가로 놓이기 때문이다. 


김원우 감독의 <한낮의 UFO를 믿으시나요>(2025)는 우리에게 믿음에 관한 질문을 던지며 시작한다. 문주와 재흥이 대화를 나누는 곳은 어떤 건물의 옥상이다. 그런데 그들은 어떻게 옥상에 올라온 것일까? 영화는 계단을 비추며 시작하고, 곧이어 카메라는 시선을 비스듬히 올려 문주와 재흥의 그림자를 보여준다. 영화의 정황상 문주와 재흥은 계단을 통해 옥상으로 향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옥상으로 연결되어야 할 계단의 끝자락은 영화에 담기지 않고, 계단을 오르는 두 인물의 그림자가 문주와 재흥의 것인지 확신할 수는 없다. 물론 그림자와 함께 들리는 두 인물의 대화를 통해 이들이 문주와 재흥임을 추측할 수 있겠으나, 영화에서 시각과 청각이 분리 가능하다는 것을 떠올린다면 해당 장면은 우리의 불완전한 추측에 기반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고개를 비스듬히 꺾어 올리는 카메라의 시선과 함께 공간은 묘하게 왜곡되어 마치 문주와 재흥, 그리고 두 인물이 함께 오르는 계단은 그림자로만 존재하는 듯 보이기도 한다. 그럼에도 문주와 재흥은 옥상에서 태연한 얼굴로 마주 앉아 있다. 그리고 우리도 이들이 마주 앉은 옥상 장면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하지만 우리는 문주와 재흥이 계단을 통해 옥상으로 올라오는 것을 보지 못했다. 그럼에도 우리는 옥상에 올라앉은 문주와 재흥의 모습을, 이들을 옥상으로 올려보낸 이 영화의 내적 논리를 믿어야 하는 것일까? 


인생의 해답을 찾는 문주 앞에 믿음에 관한 질문이 시작과 끝을 뒤집으며 가로 놓인다. 재흥은 문주에게 ‘UFO를 직접 보면 믿을 수 있겠냐’라는 질문을, 친구 소현(정효빈)은 ‘UFO를 믿는데 왜 못보냐’는 물음을 던진다. 이처럼 <한낮의 UFO를 믿으시나요>에서 ‘보는 것’과 ‘믿는 것’은 위치를 뒤바꾸며 서로의 인과관계가 되어, ‘보면 믿을 수 있고, 믿으면 볼 수 있다’라는 이 영화의 내적 논리를 만들어 낸다. 그런데 영화의 내적 논리와 다르게 문주는 재흥과 함께 UFO를 봤음에도 UFO의 존재를 선뜻 믿지 못한다. 또 자신이 본 것이 UFO라고 확신하는 소현의 태도 앞에서 당황한다. 영화 속 인물이 영화의 내적 논리 앞에서 주저하고 당황하는 모습은 영화와 인물 사이에 부조화를 일으킨다. 그리고 영화와 인물의 부조화를 통해 발생한 간극은 <한낮의 UFO를 믿으시나요>에 묘한 긴장감을 불러일으킨다. 


<한낮의 UFO를 믿으시나요>에는 인물이 만들어 낸 틈새가 있고, 그 사이에서 알 수 없는 긴장감이 흘러나온다. 그리고 이 영화의 분위기를 형성하는 틈새와 긴장감은 시각적으로 형상화되는데, 그것은 영화 속에 놓여 있는 계단과 그 위를 걸어 올라오는 정체불명의 남자이다. <한낮의 UFO를 믿으시나요>의 계단은 시공간을 왜곡한다. 이미 언급했듯 영화 초반에 나타나는 계단은 공간을 왜곡하고, 영화의 중반 문주와 소현의 목소리만 남아있는 계단은 카메라가 패닝을 하는 잠깐 사이에 이들의 신체를 사라지게 함으로써 시간의 왜곡을 만든다. 영화의 장면과 장면, 시퀀스와 시퀀스를 연결해야 할 계단이 영화 속 시공간을 왜곡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과정을 보지 못한 채 결과를 마주해야 한다. 문주와 재흥은 어떤 계단을 올라 옥상에 올라왔으며, 문주와 소현은 어느 사이에 계단을 뛰어올라 언덕에 다다르게 된 것인가. 


시공간의 왜곡으로 인해 영화의 내적 논리가 의심받더라도 우리는 <한낮의 UFO를 믿으시나요>가 보이는 이야기의 흐름을 이해할 수 있다. 계단에서 발생하는 왜곡을 제외하면 이 영화의 각 장면과 시퀀스는 발단에서 결말에 이르는 서사의 흐름과 단계를 단단하게 갖췄기 때문이다. 계단이 만들어 내는 왜곡에도 불구하고 영화의 흐름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 이것이 <한낮의 UFO를 믿으시나요>의 흥미로운 점이자 주목할 지점이다. 이 영화에서 주목할 것은 온전하게 갖춰진 서사의 맥락이 아니라 그것이 비틀어지는 순간이다. <한낮의 UFO를 믿으시나요>의 비틀림은 계단에서 발생한다. 그래서 <한낮의 UFO를 믿으시나요>는 계단을 봐야 하는 영화이다. 계단을 직시했을 때, 한낮의 UFO 앞에서 주저하고 당황하는 문주의 얼굴이 우리 앞에 가로놓인다. 


계단을 걸어 올라오는, 저 낯선 사내는 누구인가? 낯선 사내는 영화에서 유일하게 계단을 걷는 인물이다. 문주가 걷지 않은 계단 위를 사내가 걸어온다. 문주가 계단을 걷는 모습이 영화에 담기지 않기에, 계단은 시간과 공간을 왜곡한다. 하지만 사내가 걷는 계단은 시공간을 왜곡하지 않는다. 그가 계단을 걸어 옥상으로 올라오는 장면은 영화 속에 분명히 담겼으며, 사내는 문주와 소현의 목소리만 남은 계단 위를 걸어 오며 그 시간을 거쳐 지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낯선 사내는 계단이 만들어 낸 시공간의 왜곡을 상쇄하는 인물이 아닌가. 그를 더 이상 낯설고 이질적인 인물로 봐서는 안 될 것 같다. 오히려 <한낮의 UFO를 믿으시나요>의 서사를 자연스럽게 이어주며 이야기에 밀착하고 동화된 인물로 인정하는 것이 합당하지 않은가. 하지만 사내에게서 ‘낯선’이란 수식을 쉽게 지우진 못할 듯하다. 이 영화와 사내의 관계가 낯설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한낮의 UFO를 믿으시나요>에서 사내는 이질적인 인물이다. 그는 분명 영화 속에서 활동하고 있으나, 영화 속 인물 중 누구도 사내의 움직임에 반응하지 않는다. 사내가 등장할 때 울리는 기묘한 음악을 통해서도 영화가 사내를 다른 차원의 이질적인 인물로 위치시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내가 영화 속 여타 인물들과 다른 차원에 속해 있는 듯한 모습은 그를 여전히 낯선 존재로 남긴다. 사내는 낯선 존재이지만, 한편으론 이 영화의 서사에 밀착해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사내가 지닌 낯섦과 밀착이라는 이질적이고 모순된 속성은 <한낮의 UFO를 믿으시나요>의 서사와 내적 논리에 긴장감을 형성한다. 그리고 낯선 사내가 발산하는 긴장감은 스크린 밖으로 흘러나와 우리를 마주한다. 


“보면 믿을 수 있고, 믿으면 볼 수 있다.” 우리는 문주와 함께 이 난제를 마주한다. <한낮의 UFO를 믿으시나요>는 문주와 우리에게 미지의 존재를 보여준다. 그러고는 미지의 존재, 즉 UFO와 낯선 남자를 믿을 수 있느냐고 묻는다. 과연 우리가 인식한 모든 것은 믿을 수 있는 것이며, 우리는 믿는 그대로 세상을 바라보는가? 계단은, 끝자락이 보이지 않는 계단은 영화 속뿐만 아니라 현실에도 존재할 것이다. 계단의 그림자를 지나쳐 온 무언가가 태연한 얼굴로 우리를 현혹할 수 있고, 분명한 걸음으로 계단을 딛고 올라오는 누군가를 우리는 낯설어할 수도 있다. 영화 속 인물 재흥은 자신이 믿는 것을 그대로 본다. 소현은 본 것을 의심 없이 믿는다. 그런데 문주는 자신이 본 것을 의심하고 믿음 앞에서 망설인다. 이때 <한낮의 UFO를 믿으시나요>가 끝내 응시하는 것은 흔들리는 문주의 얼굴이다. 그리고 이제 우리의 차례이다. 영화가 끝나고 스크린 앞을 떠날 우리는 어떤 얼굴로 세상을 마주해야 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