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아름의 지금까지, 앞으로도
| ‘왜’를 흐린 온기에 미련이 남는 - 영화 <맨홀> |
|---|
![]() ‘왜’를 흐린 온기에 미련이 남는 - 영화 <맨홀> 송아름(영화평론가) * 영화와 소설의 주요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홀로 싸우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때의 절망감, 심지어 그 대상은 사라졌고 같이 싸우던 이들은 이제 그만하라고 다그치며 나를 나락으로 떨어뜨린다. 오롯이 고립감이 휩싸일 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누군가를 미워하거나, 미워하는 것을 티내거나, 이렇게까지 미워하는 자신이 싫어 도망가는 수밖에 없다. 도망친 곳에서도 나는 바짝 날이 선 채로 누군가를 쉽사리 받아들이려고도, 섞이려고도 하지 않는다. 아니 애초에 할 수 없었다는 말이 맞을지 모를 일이다. 故 박지리 작가의 『맨홀』이 핍진하게 그려낸 ‘나’의 세상은 이런 곳이었다. 가족들에게 온갖 폭력을 휘둘러대던 아버지, 무력하게 그곳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엄마, 공포에 떨며 함께 이 모든 것을 견뎌냈던 누나. ‘나’에게 아버지는 가족을 무너뜨리고 언젠가 죽여야 할 대상이었지만 어이없게도 그는 많은 이들의 목숨을 구한 ‘순직’ 소방관으로 생을 마감한다. 갑작스레 아버지에게 쏟아지는 찬사, 이를 받아들이는 엄마와 누나, 이 모든 상황이 역겨운 나는 견딜 수가 없다.
소설 『맨홀』이 집중하는 것은 ‘나’의 고립감이었다. 누나는 가정 폭력이라는 상황을 연극으로 받아들이며 스스로를 가장(假裝)하다 정말 연극 배우가 되어 집을 떠났고, 엄마는 일이 바쁘다며 자주 집을 비웠다. 홀로 빈공간을 채우는 나에게 남겨진 것은 아버지에 대한 극한의 증오이지만 이 고통을 함께 받아줄 것이라 생각한 이들은 ‘그래도 아버지’라는 말로 더 이상 과거를 들추고 싶어하지 않는다. 완벽한 혼자, ‘나’가 느낄 수 있는 것은 그것뿐이었다. 이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맨홀>이 조금은 순화된 세상 속 ‘나’를 세운 것은 아마도 숨통을 트일 구멍을 만들어주기 위해서일지 모른다. 선오(김준호)가 겪은 폭력은 변하지 않았지만 영화 속 그에겐 아직 친구들과 가족이 조금은 가까이 남아 있었다.
영화는 아버지 때문에 고통스러운 ‘나’의 날카로움을 그리기보다 선오라는 청소년이 인생의 한 과정을 지나고 있다는 점에 집중한다. 선오는 아직 엄마와 누나의 울타리 안에 자리하고 그에게 호감을 보이며 다가서는 친구들이 있다. 또한 조금은 거친 이들 사이에서 옳고 그름을 나직이 이야기하는 희주(민서)를 만나 안정을 찾기도 한다. 이처럼 영화는 선오가 겪었던 과거의 고통을 영화의 머리에 배치하면서도 선오가 지금 놓여 있는 환경 속에서 어떤 일을 겪고 있으며 그 시간들을 어떻게 지나는지를 보여준다. ‘나’와 누나가 아버지를 피해 숨어들었던 맨홀은 희주와 함께할 수 있는 조금은 따뜻한 공간이 되고, 누구도 ‘나’와 함께 하지 않을 것이라는 듯 텅빈 집은 엄마와 누나가 채운다. 이렇게 영화 <맨홀>이 포착한 것은 청소년기를 지나는, 아무것도 모른 채 누군가를 혐오하기도 하고 휩쓸려 다니기도 하며 서로의 마음을 아는 듯 모르는 상황들이 뒤엉킨 시간들이었다.
선오는 천천히 생각했고 많은 말을 하지 않았으며 굳이 불편해 보이는 것에 대해 짚어내지 않았다. 가족을 때리던 아버지의 감사패가 눈에 보였을 때, 그리고 누나와 엄마가 자신이 분명 싫어할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아버지를 추모하는 행사에 다녀왔다는 것을 알았을 때가 유일하게 선오가 화를 내는 순간이었다. 영화는 선오의 격앙된 모습과 이를 두려운 듯 지켜보는 누나와 엄마를 교차시키며 지금 선오의 모습이 그들에게 누구와 겹쳐 보일지를 생각게 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영화는 바로 이 정도에 머물고 있었다. 그러니까 선오의 분노가 어디에 얼마나 자리하고 있는지를 명확히 하지 못한 채 직접적으로 아버지와의 사건과 관련해서만 그 분노를 짐작하게 했던 것이다. 이는 청소년이라는 인생의 단계로 소설 속 ‘나’를 위치시키면서 어쩔 수 없이 일어난 결과로 보인다. 그러니까 아직은 미흡한, 그래서 작은 일에 덜컹거릴 수 있는 시간에 주목한 순간 아버지에 대한 분노보다 앞서는 것은 그때의 흔들림 그 자체였다. 영화는 소설이 가장 중요하게 그리고 있었던 그 역설적인 순간들, 즉 우리를 괴롭히던 악마같던 이가 순직하며 영웅으로 추앙받는 일, 그리고 ‘나’가 가장 큰 위기에 처해 있을 때 내가 증오했던 바로 그의 도움으로 벗어났던 일에 대한 아이러니를 놓치고 있었다.
물론 영화가 소설의 문제의식을 고스란히 가져올 필요는 없으며 그럴 수도 없다. 소설이 ‘나’의 내면에 집중하면 집중할수록 이를 보여줘야 하는 영화는 고뇌에 빠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영화는 소설의 주요 부분들을 적절히 스크린으로 옮겨내고 있었지만, 이 작품이 청소년의 방황 정도에 머무는 것으로 그려지는 것은 가장 경계해야 할 결과였다. 그러나 선오는 엄마와 누나의 보살핌 속에서도 엇나가는 것처럼 보였고 희주처럼 자신을 이해해주려는 이가 있었음에도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 이로 그려지며 평범의 선을 너울거리고 있었다. 선오가 그렇게나 미워하던 아버지로 인해 재판에서 선처를 받게 되었을 때, 가장 강렬한 그 순간에 영화가 집중한 것은 그를 향해 쏟아내던 친구들의 비난이었던 것처럼. 소설 속 ‘나’의 고독함이 정리되면서 선오의 내면에 무엇이 깔려 있는지, 혹은 무엇에 그렇게나 화가 나 살인을 저지르게 되었는지 등은 영화에선 이해하기 쉽지 않았다. ‘나’의 『맨홀』과 선오의 <맨홀>은 이렇게 갈라지며 다른 이야기를 했고 그 간극은 탈선으로 정리되었다. 아깝고 아쉬운 일이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