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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아름의 지금까지, 앞으로도

기억해야 할 기억을 부르는 - 영화 <허밍>
영화 <허밍> 스틸컷 이미지



기억해야 할 기억을 부르는 - 영화 <허밍>


송아름(영화평론가)


어떤 면에서 기억은 꽤 잔인하다. 결코 손 닿을 수 없는 거리에서 내 삶을 송두리째 흔들기도, 가끔은 원치않은 방식으로 가공하기도 한다. 쉽사리 빠져나올 수도 없으면서 끈질기게 달라붙어 지금에 기웃거리는 것, 그것은 간절함의 다른 형태일지 모른다. 그래서 기억은 꽤 나약하다. 누군가가 붙잡고 있어야만 간신히 남겨지고, 남겨졌다 해도 그것이 어떤 모습이었는지는 전적으로 기억하는 자에게 달려 있다. 아무렇게나 왜곡될 수도, 소중하게 각인될 수도 있는 기억의 가치는 기억하는 자의 몫이다. 영화 <허밍>이 여러 경계를 오가며 미정(박서윤)의 한 마디를 쫓는 것은 바로 이러한 기억의 속성에 가 닿는 방식일 것이다. 우리가 아프게 기억해야 할 것, 그래서 가끔은 좀 잊고 싶었던 것들에 대해 말이다. <허밍>이 과거와 현재, 영화의 완성과 진행, 현실과 영화, 생과 사 등을 오간 것은 누군가를 다시금 기억하고 그리워하는 영화적 방식일지 모른다.


영화 <허밍> 스틸컷 이미지2


녹음 기사인 성현(김철윤)은 1년 전 찍은 영화의 믹싱을 의뢰받는다. 성현이 촬영에 참여했던 영화 <국사봉과 신림, 그 사이에>에 등장했던 배우 미정의 대사가 잘 들리지 않는다는 것이 이유였다. 미정은 대본 속 대사보다 애드리브를 더 많이 했고, 내내 주의를 받으면서도 이를 고치지 않았다. 대사를 유일하게 확인해 줄 수 있는 미정은 촬영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떴고 그것을 확인해 줄 수 있는 이는 그 현장을, 그리고 미정을 누구보다 잘 기억하고 있을 성현이었다. 감독은 성현에게 부탁하며 미정의 대사를 더빙해 줄 또 다른 배우 민영(김예지)을 녹음실로 보냈지만 도무지 연락이 되지 않는다. 어쩔 수 없이 더빙에 들어간 성현과 민영은 도무지 미정의 대사를 알 수 없다. 두 사람은 과연 미정의 그 대사가 무엇이었을지를 좇으면서 천천히 촬영 현장을 더듬어 간다. 


영화 <허밍> 스틸컷 이미지3


영화 <허밍>은 <국사봉과 신림, 그 사이에>라는 영화 속 또 다른 영화와 교차하며 이야기를 만들어 간다. <국사봉과 신림, 그 사이에>의 미정과 오빠는 동네의 고개를 오르면서도 이곳에서 살 수 있다는 것에 안도했지만, 얼마 후 미정은 그곳에서 친구를 잃는다. 엄청난 폭우가 쏟아졌을 때 창문이 있던 신림의 반지하에 살던 친구와 연락이 끊어졌고, 창문도 없던 곳에 살던 자신은 오빠와 함께 아이스크림을 먹을 수 있었다. 그렇게 사라져간 친구를 기억하려 했던 영화 속 미정처럼 성현과 민영은 미정의 흔적을 밟는다. <국사봉과 신림, 그 사이에>의 공간은 <허밍>의 성현과 민영이 밟는 그곳과 겹치고, 성현이 살던 곳은 영화 속 그 동네와 다르지 않았다. 성현은 촬영장을 겉돌며 자신과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했던 미정과의 대화를 떠올리며 조금씩 더 미정에게 가까이 다가가려 한다.


영화 <허밍> 스틸컷 이미지4


영화는 곳곳에 곧 사라질 것들을 배치한다. 성현의 작업실은 재개발로 철거될 예정이며 배경 속 동네 역시 오래 남지 않을 곳들이다. 누군가에겐 심드렁했을 공간이지만 또 누군가에겐 소중했을 이곳은 떠나간 친구를 그리워했던 <국사봉과 신림, 그 사이에>의 미정과 이런 미정을 소중하게 기억하는 성현의 감정을 녹인 것과 다르지 않다. 그리고 영화는 이 사라질 것들이 얼마나 많은 것들을 담고 있었는지 역시 분명하게 그려내고 있었다. 사라질 녹음실에서는 성철의 노력과 성철과 미정이 함께했던 시간이 녹아 있고, 곧 사라질 동네의 자잘한 공간들은 친구와 헤어지던 누군가의 기억을 담고 있을 터였다. 민영과 녹음을 하거나 아이스크림 가게를 가면서도 미정을 떠올리는 성현의 기억과 감정의 소중함은 휘발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공간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었을지 모른다.


영화 <허밍> 스틸컷 이미지5


이러한 공간을 채우고 있던 또 하나의 감각은 청각이었다. 성현은 무심하게 흥얼거리던 미정의 허밍을 기억했다.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시공간을 넘나들며 화면을 채우던 허밍 소리는 이 영화가 잡고 싶어하던 기억이 희미하면서도 얼마나 넓게 퍼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가볍게 우리 옆에 있는 것 같지만 더는 명확해지지 않는 그 소리는 아쉽게 떠나간 많은 이들의 존재 방식 같은 것이었다. <국사봉과 신림, 그 사이에> 속 미정이 떠올린 친구의 죽음이 그랬던 것처럼, 그리고 자유로운 자신의 감정을 제한하는 연기를 견디지 못했던 <허밍> 속 미정처럼 분명 무엇인가를 꿈꾸었지만 더는 버텨내지 못했던 그들은 마치 허밍처럼 분명치는 않지만 누군가의 기억에는 각인되는 방식으로 남아 있었다. 영화 <허밍>은 어렴풋 하지만 존재하고 있던 그들을 기억하자며 우리에게 손 내밀었다. <허밍>과 함께 그들을 조우해야 할 때, 지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