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아름의 지금까지, 앞으로도
| 우리가 아팠던 기억, 그 모든 것을 내가 가져갈게 - 영화 <누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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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아팠던 기억, 그 모든 것을 내가 가져갈게 – 영화 <누룩> 송아름(영화평론가) 부정적인 감정은 최대한 맞닥뜨리지 않아야 하는 것, 만약 대면해야 한다면 빠르게 털어내야 하는 것으로 자리잡았다. 잊고, 곱씹지 않으며, 훌훌 날려보내는 행위들은 굳이 겪고 싶지 않은 마음을 해결하는 방법이다. 고통, 특히 고통이라는 감정이 그렇다. 아프고 괴롭기 전에 원인을 찾아 고통의 시간을 어떤 식으로든 단축시켜야 한다는 생각은 이 감정을 없애야 한다는 강박에서 기인했을 것이다. 그러나 고통만큼 분명히 기억해야 하는 감정도 드물다. 고통을 느끼는 그 자체에서 사람다움에 대한 기준이 피어나기도 한다. 도대체 내가 혹은 우리가 왜 이러한 아픔을 감내해야 하는가라는 질문 속에서 고통은 의미를 발하고 이후를 생각하게 만든다. 그래서 내 고통뿐만 아니라 타인의 고통까지 간직할 수 있을 때 우리는 함께 살아간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 <누룩> 속 다슬(김승윤)을 보며 고통에 대한 생각들을 떠올린 것은 타인의 고통까지 짊어지는, 아니 짊어지려는 다슬의 노력이 너무도 아렸기 때문이다.
영화 <누룩>은 막걸리는 만드는 다슬의 아빠(박명훈)뿐만 아니라 동네 사람들 모두가 좋아하는 다슬이네 막걸리의 핵심 재료 누룩이 사라지는 것으로 시작된다. 다슬이네 막걸리를 먹으면 기분도 컨디션도 좋아지는 것 같아 사람들은 좋은 일엔 늘 다슬이네 막걸리를 찾지만, 누룩의 출처와 성분 등을 밝힐 수 없는 탓에 알음알음 동네에서만 마시는 술이었다.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던, 심지어 고등학생인 다슬이조차 자부심을 가지고 홀짝이던 막걸리의 맛이 갑자기 변해버리고 다슬이는 양조장의 누룩을 되찾기 위해 분투한다. <누룩>은 초반 가벼운 해프닝처럼 다슬이네 막걸리를 스케치하며 청량감을 주지만, 누룩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영화는 천천히 관객들에게 질문을 던지기 시작한다.
다슬이네 양조장의 누룩은 그 출처를 알 수 없다. 갑작스레 인수하게 된 곳에 있던 누룩은 몇 년째 써도 줄지를 않고, 어떤 식으로든 되돌아오기도 한다. 이렇게 이상한 듯 신비한 누룩을 믿고 관리하는 이는 아빠보다도 다슬이다. 영화는 다슬이 과거 엄마가 막걸리를 먹고 컨디션이 좋아졌고, 이를 맹신한 탓에 결국 사망에 이르렀다는 전사를 슬쩍 흘린다. 이것으로 아빠는 비행이라고도 할 수 있는 다슬의 음주를 이해하고, 오빠인 다현(송지혁)은 그런 다슬을 말려야 한다며 부딪히는 탓에 얼핏 막걸리로 인해 벌어지는 가족의 갈등을 드러내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영화가 진행될수록 다슬이 생각하는 누룩은 단지 술을 빚는 원료 이상의 것이다. 그리고 천천히 영화는 다슬이 우리 모두를 위한 고통을 짊어진 이라는 것을 드러낸다.
다슬이 처음 누룩이 없어졌다는 것을 알고 멍하니 걸을 때 화면 밖에서 선 알 수 없는 비명소리가 들려온다. 마치 다슬에게만 들리는 것 같은 이 소리는 이후 다슬이 상담사에게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놓을 때 그 정체를 파악할 수 있다. 다슬은 누룩이 사라진 후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일상을 놓아버렸고, 작은 상담실에서야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 흥미롭게도 이 장면에서 상담사의 모습은 파티션에 가려진 듯 전혀 정체가 드러나지 않는다. 마치 다슬이 상대 없이 혼자 이야기하는 듯한 구도와 아프다고 고함치는 사람들이 느껴진다고, 꿈에서도 사람들의 시체를 보고 그들의 고통이 느껴진다고 하는 다슬의 말이 겹쳐질 때, 다슬이의 설명은 마치 모든 것을 감내한 이가 홀로 자신의 넋두리를 털어놓는 것이 아닐지를 생각게 된다. 그러니까 다슬은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또 누구도 이해하지 못할 타인의 고통까지 짊어진 이로서 다시 독해되는 것이다. 마치 영매처럼. 이러한 맥락에서 다슬이네 누룩이 출처를 밝힐 수 없어 정식으로 유통되지 못한다는 설정은 의미심장하다. <누룩>은 다슬이네 막걸리가 사실상 불법이라는 것, 그래서 많은 이들에게 팔 수 없다는 것을 두어번 반복하여 이야기한다. 성분표기를 할 수 없고 그래서 합법적이 될 수 없다는 것은 이 누룩이 누구에게나 전달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할테다. 공식적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무엇, <누룩>은 이를 통해 고통이라는 것이 어떻게 흘러가고 있었는지를 드러내고 있는 셈이다. ‘공식’이라 할 수 있는 영역에서 온갖 편가르기를 경험해야 했던 많은 이들의 고통은, 마치 다슬이라는 영매를 통한 것처럼, 작은 공동체에서 혹은 몇몇 사람들만의 이해 속에서 함께 이어졌다. 이처럼 영화는 우리가 보아왔던 그리고 지금까지 이어져왔던 고통을 날카롭게 정의하며 다슬에 집중한다.
다슬은 느껴진다고 했다. 누군가의 고통도, 또 누룩을 찾는 것도 느끼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했다. 누군가의 고통을 자신과 연결해 줄, 그래서 다른 사람에게서는 그 고통을 줄여줄 매개인 누룩을 통해 다슬은 사람들을 위로하고 있었다. 물론 다슬의 이러한 행동은 범인(凡人)들에게 이해받지 못할 터였다. 다현이 다슬에게 날을 세운 것은 자신의 동생을 미친 X이라 부르는 이들 때문이었다. 이처럼 다슬은 누군가에게는 보살핌을 받았지만 또 누군가에게는 불가해한 이로 자리하며 가족들을 불편하게 하기도 했다. 가족들은 내 딸을, 동생을 그저 제 자리에 돌려 놓아야 하는 것으로 생각했지만, 점차 이에 대한 생각도 바뀌어 간다. 다슬은 아빠에게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이상한게 느껴져 덤덤해지기까지 오래 걸렸다고 이야기하며 이해를 구했다. 또한 다현은 기이한 형태로 다시 돌아오는 누룩을, 그리고 진짜 느끼는 것만으로 누룩을 찾던 다슬을 보며 다슬의 말을 믿기로 한다. 이렇게 되찾은 누룩은 결국 되돌아올 수 없는 상황을 맞닥뜨리지만 더 이상 다슬의 고통은 혼자만의 것이 아니게 된다.
마을에는 다슬이네 막걸리를 탐하는 부랑자 무리가 있었다. 다슬이네 막걸리가 쌓여 있는 것만 보이면 그것을 달라는 듯 이상한 소리를 내곤 했다. 그랬던 그들이 딱 한 번 자신들의 목소리를 냈던 때가 있었다. 다현은 다슬이 진짜 누룩을 찾을 수 있는지를 시험하기 위해 누룩을 부랑자들의 소굴로 가져갔고, 이들은 이것으로 술을 빚어 먹었지만 크게 탈이 난다. 그들의 공간에서 다슬이 누룩을 다시 가져오려 할 때, 그들은 처음으로 말을 하며 우리같은 천한 놈들에게도 귀한 놈들이 찾아왔는데 그것을 왜 줬다 빼앗아 가느냐며 소리쳤던 것이다. 이때 다슬은 말한다. 다시 가져가보라고, 익지도 않은 것을 그렇게 마시면 평생 고통스러울 것이라고. 다슬의 이 말은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을, 미처 헤아리지 못한 고통을 함부로 대하는 이들이 어떤 일을 겪게 될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누룩>은 누군가를 위해 대신 아파한다는 것, 그것이 얼마나 어렵고 또 소중한 것인지를 아프게 풀어내고 있었다. 우리가 모두 힘들었던 순간들을 잠시만 떠올려봐도 이제 쉽게 손가락의 개수를 넘어간다. 그들의 고통을 대신했던 다슬, 그의 막걸리로 우리도 함께 취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











